가족실 소파에 앉으면 마주 보이는 그림이 있다. 세 개의 액자 중 요즈음 자주 눈길이 가는 것은 왼편에 자리 잡은 피사로의 ‘퐁투와즈의 외딴집’이다. 녹색과 갈색을 사용하여 파리 근교의 전원을 그린 시골 풍경화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지극히 조용한 느낌이어서 얼른 눈에 들어오는 그림은 아니다.
이 인쇄 그림은 2006년 LACMA의 ‘피사로와 세잔 전시회’를 관람하고 나오면서 샀다. 다양한 색채로 눈길을 끄는 그림이 많았는데 그때 액자에 넣어진 피사로의 그림이 이것뿐이기에 마지못해 샀다. 전시장에서 강하게 느낀 피사로의 인품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없었다면 결코 사지 않았을 그림이었다. 그림은 한적한 시골 언덕길을 내려오고, 올라가는 부인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카피용지보다 조금 큰 사이즈로 축소된 것이라 소파에 앉아서 바라보면 한 여인이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며 산책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이 그림과 한 방에서 지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마음에 들었다. 피사로의 그림이 무척 많은데 왜 하필 그 그림을 액자에 넣어서 사람들에게 권했을까 했는 데 이제 그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피사로가 세잔에게 베푼 친절과 가르침이 떠올랐다. 피사로의 따뜻한 영혼이 전해져서 나의 마음도 절로 훈훈해졌다. 그 때 전시장에는 나란히 전시된, 세잔이 피사로의 그림을 모방하여 그린 똑 같은 구도의 그림이 얼마나 많았던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으나 불안정한 영혼을 가진 세잔을 피사로는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품어 가르쳤다. 피사로의 성인과도 같은 반듯한 영혼이 떠올려졌다. 전시회 내내 나는 그림으로 보여주는 피사로의 인품에 매료되어 감탄에 싸였었다.
세상에 널려진 온갖 욕망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과 달리 피사로는 언제나 평온한 영혼을 가지고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세간의 평에 연연하지 않고 언뜻 보면 단순한 그림 속에 자신의 삶의 철학을 그려 넣었다. 시류에 편승하여 남의 마음에 들려는 그림을 억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관을 그린 그림이 얼마나 대단한 그림인지 이해가 되었다. 순함과 다정함 속에 감춰진 강철처럼 단단한 피사로의 내면이 감지되기도 했다.
세잔은 격렬한 감정이 담긴 붓질과 사물에 대한 개성있는 해석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림을 그렸다. 피사로의 격려와 가르침이 없었다면 세잔이 ‘현대회화의 아버지’라고 칭송을 받을 만큼 성장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는 피사로 그림의 언덕길처럼 나의 인생길도 가파르지 않다. 화려하지도 격렬하지도 않다. 10도 정도로 경사가 진 뾰족한 C자형 구부러진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가면 된다.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쓸데없는 걱정들이 나를 지배할 만큼 더 이상 어리지도 않다. 욕망을 내려놓아 마음의 평안을 누리면서 한가롭게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화려한 꽃이 핀 길도 아니고 바닥을 다져 단장한 길이 아닐지라도 길가에 돋아난 풀과 나무들,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흙길을 쉬엄쉬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피사로가 그린 퐁투와즈 언덕길은 내 영혼의 산책로가 되었다. 언덕을 오르며 나는 언제쯤 저렇게 반듯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곰곰이 한다. 그날이 오기는 올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피사로가 아버지처럼 다정하게 말하는 듯하다. 그림은 화가가 그리지만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재해석해서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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