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마는 싫어요!”사돈내외와 우리, 그러니까 모두 네 명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두살배기 손녀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서로 관심을 끌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도 질세라 그동안 스카이프 화상통화로 아이와 익혀온 댄스동작을 시작했다. 아이는 음악을 켜고 저도 댄스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 손뼉을 치고 웃으며 따라했다. 내가 손녀 앨리한테 물었다.
“엘리 배꼽은 어디 있지?”아이가 웃옷을 들어 올려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제 배꼽을 가리키면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둘러본다. 박수가 터진다.
“할머니 배꼽은 어디?” 하고 물으니 내 앞으로 걸어와 내 옷을 들추려고 한다. 사돈 앞에서 배꼽을 노출당할 뻔했다. 다시 와~ 웃음이 터진다.
“다디는 어디 있지?” 하고 안사돈이 묻는다. 인도인인 사돈과 한국인인 우리의 대화는 물론영어로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아이는 “대디! 대디!” 하면서 아빠가 온 줄 알고 현관 쪽으로 달려간다. 외가 쪽 할머니 할아버지는 한국어 호칭으로 가려낼 줄 아는데 친가 쪽 조부모의 인도어 호칭은 아직 식별이 안 되는 아이한테 사돈 내외는, 특히 안사돈은 실망하는 눈치다.
인도어로 친할아버지는 ‘다다’ 친할머니는 ‘다디’이다. 나도 이 간단하면서도 헷갈리는 인도어 호칭이 아직도 머리에 입력이 안 돼 안사돈에게 여러 번 물어야 했다. 그러니 말이 늦어 이제 표현할 줄 아는 단어들이 고작 ‘대디’ ‘맘’ ‘업’ ‘다운’ ‘밀크’ 정도인 아이가, 어떻게 ‘다다’ 와 ‘다디’를 ‘대디’와 구분해서 부르겠는가.
내가 제안을 했다. 아이가 말문이 트일 때 까지는 혼돈되지 않게 당분간 영어 호칭을 써서 친조부모를 ‘그랜파’ ‘그랜마’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사위와 딸도 아이가 말이 늦은 상황을 고려해서 그렇게 해달라고 한 것을 알기에 그렇게 부탁을 해봤다. 그 때 안사돈이 이렇게 단호하게 답을 한 것이다.
“그랜마는 싫어요! 나중에 꼭 가르칠 거예요!’”같은 할머니로서 안사돈의 심정이 백분 이해가 되었다. 낯선 것이다. 자신이 자랄 때 할머니를 불렀던 대로 ‘다디’라고 불리고 싶은 그 심정을 왜 모르겠는가. 햇솜 같은 아이, 보고 싶어서 늘 눈에 밟히는 귀한 내 손녀가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기를 바라는 게 왜 쓸 데 없는 욕심이겠는가. 나도 어느 날 아이가 날더러 ‘할머니’라고 부르며 안길 때의 느낌을 상상만 해도 온 몸에 전율이 온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아이 앞에서 아이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보고 싶어 재롱을 부리는 할머니, 할아버지, 다디, 다다들은 한마음으로 소망하는 것이다.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라고.
안도현 시인의 외할머니도 못 말리는 할머니이셨던 모양이다.
“오늘은 마당가에 풀 뽑던 외할머니보다 먼저/ 외할머니 눈물이 그렁그렁 마중 나옵니다/ 아이구 내 새끼 오네/ 남조선 천지에서 시 제일 잘 짓는 새끼” <안도현, ‘여름방학’ 일부>자식 키울 때는 힘주었던 목이 손주 앞에서는 까닥까닥 거리며 재롱을 떨고 “남조선 천지에서 시 제일 잘 짓는 새끼”라는 푼수가 거침없이 나오는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다디, 다다, 그랜마, 그랜파들은. 손주의 ‘꽃’이 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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