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누었던 큰 오빠와의 추억을 나는 영영 잊지못할 것이다. 잘생긴 얼굴에 강골 체격, 그리고 예술적 재주가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으셨지만 그만 62세에 타계하고 말았기에 그 안타까움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나는 가끔씩 추억의 기차를 타고 마치 ‘닥터 지바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덮힌 벌판을 그리운 그 큰오빠와 함께 달리곤 한다.
내 추억의 기차는 우선 1962년경에 멈추어 선다. 오빠는 고교를 졸업한 직후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명문대 영문학과를 다니시면서도 방학중에는 반드시 고향땅으로 오셔서 나를 데리고 강변으로 그림을 그리려 나가셨고 유려한 풍광을 살린 시와 글도 동시에 지으시곤 하셨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큰오빠와 함께 마음껏 즐겼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수채화폭에 담긴 옛기억을 멀리하고 추억의 기차는 또다른 정류장으로 달리고 있다.
두번째 추억의 정류장은 1967년경, 오빠는 한참 전쟁중인 월남으로 근무를 가신다고 했다. 그 후로는 자주 볼 수도 없이 서신교환만 하였다. ‘뒷마당 닭장에 닭이 오십마리가 있어요. 우리는 예쁜 닭을 골라서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라고 생생한 소식을 전해주면 오빠는 무척 기뻐하며 총탄이 빗발치던 전쟁터에서도 꼬박꼬박 답장을 해주셨다.
세번째 정류장은 월남에서의 근무를 마친 후 캐나다,그리고 미국에서 활약한 오빠의 문인협회 활동장면이 생각난다. 캐나다에서 한인 문인협회를 창설하는데 앞장섰고 남가주에서 미주 한국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신 오빠는 시, 수필,희곡, 그림,사진 등에 관한 작품을 많이 남기시고 전시회도 많이 여셨지만 그토록 자신하던 건강의 의외성을 건너뛰지 못하시고 지금은 우리에게 여운만 남긴 채 저멀리 영원한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가셨다. 큰 오빠와의 추억을 포함하여 지나간 일들을 되돌아보면 인생이란 결국 완성이란 종착지를 향해 가는 미완성의 여정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길에 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열심히 써보았지만 미진했던 나의 글 13편을 애정으로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나의 컬럼글을 마치려 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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