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가을 비 탓인가? 헬스클럽의 수영장이 텅 비었다. 세 개의 레인이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중앙 레인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내가 선호하는 레인은 단연 중앙 레인이다. 좌우 레인은 벽 때문에 중앙에 비해 선호도가 밀린다. 한 레인을 보통 2명이 이용하지만 좌우 레인에 비해 폭이 약간 좁은 중앙 레인은 끼어드는 수영객이 적은 편이어서 홀로 수영을 즐길 기회도 많다.
레인을 함께 쓴다는 것은 다소 불편하고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수영을 하다 보면 몸이 서로 부딪히거나 상대 발에 채이기도 하고 물장구치는 수영객을 만나면 물세례도 각오해야 한다. 수영으로 스트레스 풀고 기분 전환하려다 기분을 잡쳐버린다.
개구리 수영에 한창 몰입하고 있을 때였다. 잔잔하던 내 레인에 갑자기 거친 물결이 일었다. 거구의 중년 백인이 내 레인에 끼어든 것이다. 그는 손을 흔들어 나에게 전입을 신고한 뒤 배영으로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평화롭던 중앙 레인은 그의 개입으로 평화 무드가 깨지고 말았다.
잔잔하던 나의 마음에도 풍파가 일기 시작했다.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한 기분이었다. 좌우 레인이 비었는데도 기어코 나의 레인에 끼어드는 얌통머리 없는 행위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의 존재를 무시해 버렸나? 나를 밀어내기로 작심했나? 심심해서 말동무를 찾아 끼어들었나?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수영을 하다 보니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지각없는 행동에 대해 따끔하게 한마디 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이 봐요. 좌우 레인이 저렇게 텅 비어 있는데…”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며 ‘거구’에게 호소하듯 말했다. “알고말고요. 사람이 많을 때엔 한 레인을 두 명 이상도 쓰잖소.” 전혀 문제가 될게 없다며 씩 웃는 그를 몰아낼 정당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헬스클럽 내규에 레인 이용자 숫자에 관한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결국 불만을 품은 내가 문제인 셈이었다.
“양보하자. 그가 중앙 레인을 원한다면 나는 좌측 레인을 택하지.”조카 롯에게 거주지 선택 우선권을 주고 가나안에 이주한 성경 창세기의 아브라함을 떠올리며 나는 기꺼이 좌측 레인으로 옮겨갔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우리 속담처럼 억울하게 밀려난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양보를 하고나니 속이 편해졌다.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다시 수영에 몰두할만한 때였다. 잔잔하던 내 레인에 물결이 또 크게 일었다. 어느 틈에 근육질의 흑인 청년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우측 레인을 흘끗 넘겨다보았다. 그곳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이 친구 심보는 또 무엇인가? 그는 물장구를 크게 일으키며 자유형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혹 떼려다 큰 혹 붙인 격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훌쩍 우측 레인으로 옮겨가면 만사가 형통할 듯싶었다. 텅 빈 우측 레인이 나를 어서 오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한 번 양보 했는데 두 번 못해?” 그러나 두 번씩이나 양보한다는 사실을 나는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말이 양보지 경쟁에서 계속 밀려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만약 옮겨간 우측 레인에서 또 양보한다면 수영장을 떠나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었다. 우측 레인으로 뜰까 말까를 놓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나의 양보는 미덕은커녕 현실도피 같았다.
나는 우측 레인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고 ‘거구’가 독점하고 있는 중앙 레인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서툰 자유형으로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10분쯤 마구 물장구를 쳐댔더니 온 몸이 나른해졌다. 수영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다 ‘거구’와 마주쳤다. 그가 ‘돌아온 탕자’ 맞듯 나를 반겼다. “내가 보고 싶어 돌아왔나?” 그가 짓궂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레인 끝에 서서 잠시 상념에 빠졌다. 공유해야할 레인을 함께 쓰는데 왜 이다지도 심사가 뒤틀릴까?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편의와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양보를 잊고 사는 것이 현대인들의 삶 아닌가. 서로의 편의를 조금씩 양보하고, 그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이것이 더불어 사는 인생의 지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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