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매일 매일 하는 작은 행동들은 세상에 우리의 존재감을 성립시키고, 확인시키고, 또 재확인시키기 위한 일인 것 같다.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SNS의 글들은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 현재 ‘나’의 생각, 기분 상태, 행동들을 알리면서 본인의 존재감을 남에게 확인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꼭 인터넷 같은 매체를 사용하지 않아도 하는 행동들이 결국엔 ‘나’의 일부를 남에게 각인시켜 ‘나’의 존재감을 알리는 것 아닐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분명 내 생각을 적어 나아가면서 나의 자아의 일부를 세상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이 글 속에서의 나의 존재감은 더욱더 굳혀지고 단단해진다. 이 존재감을 ‘선언’하는 행동이 우리의 삶 속 다른 행동들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William Faulkner의 ‘The Sound and the Fury’의 두번째 챕터는 소설의 인물들 중 하나인 Quentin의 목소리로 쓰여져 있다. 시대적 배경은 20세기 초반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흑인과 백인의 사회적 위치의 차이가 간소해지고 있었고, 이 현상에 대해 불편함과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들(특히 백인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 사회의 시대적 배경을 염두했을 때, 두번째 챕터에서 보여지는 Quentin의 흑인 인물에 대한 선행은 그 인물을 향한 진심이 아닌, Quentin 본인의 백인의 ‘우월감’을 성립하고 선포하기 위함이라 생각할 수 있다.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흐려져 가는 ‘구세주’의 ‘우월감’은 Quentin에겐 없어선 안되는 그의 자아를 성립시키는 중요한 부분이며 그는 결국 타인을 통해 본인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희생이 있다.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나의 시간을 ‘희생’시키는 작은 규모부터 더 나은 인류 사회를 위해 본인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것처럼 ‘희생’의 범위는 넓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생활 속의 작은 희생들을 정말 남, 즉 그 희생의 덕을 보는 대상, 을 위해 이러한 결단을 내리는 것일까? 아니면 일종의 봉사 정신을 발휘한 내 모습에서 생길 수 있는 우월감 속 쾌감을 통해 ‘희생정신’이 투철한 나의 자아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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