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웨스트버지니아의 한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인구 삼만 정도의 그 작은 도시는 약 이십분이면 끝에서 끝으로 갈수 있는 전형적인 미국의 시골 도시다.그가 약 열두어살때 하루는 가족들과 텔레비죤을 보는데,로스엔젤스에서 펼쳐지던 로스볼을 우연히 보던중 사람들이 모두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있더라는 것이다.자신이 살고 있는 곳은 한참 엄동설한인데 캘리포니아는 마치 한 여름을 상상케해 그 광경이 너무 쇽크해서 그때부터 그는 캘리포니아를 동경하게 됐다는 것이다.그래서 머리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만 보면 나를 좀 캘리포니아로 데려다줘!하며 속으로 소원을 빌게 됐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징집이 된 그는 그때 한참 전쟁중이던 베트남으로 가게 되었는데 행운이라면 행운이랄까 그 당시 한국의 프에블로 사건이 터져 다시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오게 됐다는 것이다.그는 한국땅에 도착하자마자 땅에다 키스를 했다고 한다.이젠 살았구나 싶어 너무 고마워서ㅡㅡㅡ.
그후 그는 나를 만났고, 우리들은 결혼을 하고 바로 샌프란시스코로 오게 되었다.마침 큰 시누가 이곳에 살고 있어서 그들에게 약 한달간 신세를 진후 우리는 독립을 해서 처음 살게 된곳이 체스낱 스트리트가 있는 마리나였다.남편은 제대한지 일주일 만에 쉐브론에 취직이 되었고,지금 생각해보면 모든게 행운이었다.
나는 곧 딸을 임신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이었다.나는 가끔 심심하면 삼십번 버스를 타고 차이나 타운에 가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먹거리를 찾아 다니곤 했다.싱싱해 보이는 무도 사고 생선도 샀다.고추가루를 찾지 못해 처음엔 매운 멕시코 소스를 사서 김치 비슷하게 버무려 먹기도 했다.두고온 두 아이들이 그리울때마다 나는 마리나 비취에 가서 먼 태평양 바다를 바라보곤 눈물짓기도 했다.
그때 나는 기다림을 배웠다.이 긴긴 기다림이 끝나면 어느날 나는 내 사랑하는 아이들을 만날수 있다는 것을 믿고 믿었다.그 기다림은 장장 오년의 세월이 필요했다.결국 아이들은 내 곁으로 오게 되었고, 그 긴 기다림과 눈물의 시간은 끝이났다.나는 미국에 와서 남들처럼 육신적인 고생은 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있었다.그런 고통과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들이 오늘 내게 영적인 거름이 되어서 내가 한줄의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인생에서 공짜는 없다.결국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행복도 불행도 성공도 실패도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것이다.
이번 겨울은 처음엔 유난히 추웠지만 요즘은 봄날씨 같은 날이 계속된다.동북부는 마치 알라스카를 연상시켜 전국이 추위로 몸살을 치루는데 유독 캘리포니아만 봄이다.정말 유난히 따뜻한 겨울이다.낮에 따뜻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언덕길을 내려가면 벌써 키 작은 히야신스 꽃들이 노란색 하얀 색들로 피어나 그 앙징맞은 모습들을 자랑한다.
지난 12월달은 내게서 사랑하는 두 사람을 앗아갔다.오빠는 수십년 간을 멀리서 살았지만, 스탠리는 지난 시월에도 함께 하와이에서 일주일을 보냈던 사람이다.스탠리는 메리의 남편이다.그의 죽음은 한순간에 사람의 생명이 연기처럼 사라질수 있다는 것을 너무 실감나게 보여주었다.더구나 누구보다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심장마비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새벽에 죽어갔다는 사실이 너무 비통했다.그는 사십에 미스터 후리몬트에 당선돼 그 당당한 근육을 나이 칠십에도 자랑했던 사람이다.그가 죽었다는 메리의 전화를 받고 달려 갔더니 거실에 그들이 대학 시절 약혼후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긴 금발의 메리와 활짝 웃고 있는 스탠리의 모습이 너무도 젊고 아름다워 나는 한참동안 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정말 선남선녀였다.그 빛나던 시절,그 빛나던 아름다움이 오히려 나를 슬프게 했다.
그가 떠난지 이주일이 되었다.메리는 생각보다 씩씩하게 견디고 있다.그녀의 가족들이 다 떠나 나는 막내 며느리와 함께 비빔밥을 만들어 가지고 그녀에게 달려갔다.큰 집에 그녀는 달랑 혼자였다.비빔밥을 먹으며 그녀는 결국 그 큰 푸른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내 어깨에 기대 가만히 흐느껴 울었다.비빔밥은 스탠리가 가장 좋아하던 메뉴였다.
나도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우리들은 스탠리와 함께 지내던 재미있는 추억을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래도 산사람은 산다는 말이 있다.메리는 또 다시 일을 시작했고 그런대로 인생은 다시 흘러갈 것이다.마치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는것 처럼,ㅡㅡㅡ 나는 가끔 남편을 놀린다."당신 소원 성취했네.이젠 캘리포니아 사람이 되어서"사실 그가 자란 파커스버그라는 시골에서 큰 도시로 나와 그래도 성공했다고 사는 친구들은 몇이 안된다는 것이다.어릴때 자동차도 없이 가난하게 자란 남편이 지금 이만큼 산다는 것은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성공했다는 것이다.그 작은 도시를 탈출했다는 자체가 대단하다는 말이다.우리 가족은 캘리포니아에서만 사십년 이상을 살았다.네 아이들 모두 십오분에서 사십분 걸리는 곳에 살고 있다.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아이들이 모두 건강하고 사람답게 살고 있는게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느 친구가 우수개 소리를 했다."백수들이 노느라고 과로사 한다고"우리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노인들이 뒷방신세를 졌던 시절은 지났다.우리 친구들은 바쁘다.매일 함께 아침 운동하고 함께 아침 먹고 또 함께 즐겁게 논다.요즘은 매일 날씨마저 봄이 온것 처럼 화창하다.사랑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지만 그래도 올해는 따뜻한 겨울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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