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곡할 사건’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정초, 나는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에서 인기척에 놀라 혼비백산 내빼는 ‘범인’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미궁에 빠졌던 사건의 범인을 끝내 색출해낸 형사가 상사에게 낭보를 전하듯 나는 즉각 아내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드디어 범인을 찾아냈어!”
영문을 모르는 아내는 밑도 끝도 없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 나를 멀끔히 쳐다보았다.
지난여름이었다. 뒷마당에 내다놓고 쓰던 유리탁자의 유리판이 깨져버렸다. 두께가 1.5 센티미터나 되어서 두발을 딛고 올라서도 꿈쩍 않던 유리판이었다. 아내는 퇴근해서 돌아온 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전날까지 말짱하던 유리판이 아침에 보니 한 귀퉁이가 크게 깨져 떨어져나간 채 바닥에 내려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대충 현장검증을 마친 뒤 나는 마치 과학수사 요원처럼 한마디 무심코 내던졌다.
“고열에 의한 급열팽창이거나 망치 따위로 세게 내려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깨질 수가 없는 유리인데……. 귀신이 곡할 사건이군.”
고열에 의한 경우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제외하고 덜렁이 정원사의 실수가 아니면 누군가 들어와 깼을 거라는 음산한 추리를 하다가 나는 사건을 종결해 버렸다. 탁자에는 깨진 유리판 대신 묵직한 나무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범인이 누군데?” 지난 사건을 떠올린 아내가 호기심이 잔뜩 서린 표정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범인’ 색출의 전말을 아내에게 의기양양하게 늘어놓았다.
‘범인’은 꿈속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카요테였다. 야산을 깎아 조성한 주택지여서 우리 집 뒷마당에 가끔 출몰하는 카요테의 존재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그물망에 넣어 말리던 고등어를 물고간 적도 있었으니까.
그 날 카요테는 탁자 나무판 밑으로 머리를 깊숙이 들이 박고 소쿠리 안을 정신없이 들쑤시다가 내 인기척에 놀라 나무판을 들치고 후다닥 줄행랑을 놓았다. 왼편이 튀어 올랐던 나무판은 탁자의 쇠다리를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치 ‘범인’인 카요테가 현장검증에서 유리판 대신 나무판을 사용해 범행을 재연하는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아하! 그랬었구나!” ‘귀신 곡할 사건’의 전모가 확연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탁자 유리판은 네 개의 탁자 쇠다리 위에 고정되지 않은 채 얹혀 있었다. 본래 유리판과 쇠다리 접촉 부위에 투명한 충격방지 고무 패드가 끼워져 있었으나 모두 분실된 상태였다. 유리판을 들었다 놓으면 고무 패드가 없는 쇠다리에 유리판이 직접 부딪쳐 깨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탁자 밑 소쿠리 안에는 카요테의 먹거리가 됐음직한 갖가지 채소가 담겨있었다.
내 보고를 듣고 난 아내가 드디어 누명을 벗게 되었다며 입을 열었다. 집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사건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었던 아내는 알리바이나 결백을 증명해 보일 수 없는 답답한 처지여서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참고 지냈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내가 무심코 뱉은 ‘귀신이 곡할 사건’을 ‘당신이 안 그랬다면 참말로 귀신이 곡할 사건’으로 새겨듣고 꽤나 속상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제정신 있는 남편이 어찌 아내를 범인으로 몰아붙일 수가 있으며 정신이 온전한 아내가 무슨 별난 취미로 멀쩡한 유리를 내려쳐 깨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데 오해를 사고 의심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인가?
요즘 세상에 귀신 곡할 노릇이 어디 있는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에 그 동안 무고한 아내만 마음고생을 시키고 말았다. 모르면 그저 모른다고 하거나 잠자코 입을 닫고 있으면 될 것을 하도 신묘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귀신 곡할 노릇’으로 치부할 노릇이 아니다.
세상에 사람 머리로 이해 못할 노릇이 어디 하나둘인가? 말 한마디에 ‘귀신이 곡할 노릇’이 ‘사람이 곡할 노릇’이 되는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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