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와 나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 만화영화를 본다. 트렁크 두개들고 미국으로 왔던 나는 뭐 하나 장만하는 게 어려워 뭐 하나 안버리고 일생을 살아 왔다. 손자의 아범인 큰애가 어렸을 때 덮던 유치찬란한 핑크색과 파란색 줄무늬 밍크담요는 이런 할머니의 꿋꿋한 구질스럼 속에서 살아남아 이제 우리는 사이좋게 그 이불을 덮어쓰고 만화영화를 본다. 손자는 한번 필이 꽂히면 수없이 보고 또 본다.
할머니를 포로로 옆에 잡아 놓는 건 필요불가결한 사항이기 때문에 나 역시 선택의 여지없이 보고 또 봐야 한다. 그런데 니모나 토토로까지는 그저 어린 애 영화려니 했는데 UP을 보면서는 애들 영화가 어쩜 저렇게 철학적일수 있을까, 감탄하며 또 감동하며 봤다. 남은 삶을 살게하는 원동력인 추억어린 모든 것도 새로 사랑하게되는 친구의 목숨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내다 버린다. 우리가 아끼는 모든 게 어느 순간에 와서는 그저 껍데기에 불과 할 뿐이라는 걸 깨닫지 않는 이가 있을까. 이즈음 손자는 WALL-E에 푸욱 빠졌다. 몇년 전 나의 필요를 귀신같이 짚어내는 작은 아들이 엄마가 좋아할 영화라고 보여주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그 자리에서 광팬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손자가 그 영화를 이해 할 나이가 된거였다. 손자는 아침이고 저녁이고 시간만 나면 할머니하고 그 영화 보자고 담요들고 쫒아온다.
미래에 지구가 온통 쓰레기로 억망이 됐을 때 모든 사람들을 우주선으로 이주시키고 월-이라는 작은 로보토를 시켜 지구를 청소시킨다는 배경인데 이 작은 로보트가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처럼 감성이 뛰어나다. 가끔 우주선에서 행여 지금쯤은 지구에 식물이 살수 있는 환경이 되어있나, 살펴보게 하는 이브라는 로보트를 보내는데 월-이는 이브를 보는 순간 좋아 죽는다. 친구가 되고 싶어 제 보물도 있는대로 다 보여주고 그러다 최근 발견해 낡은 구두에 옮겨 심어 갖고 있는 식물을 보여주는 순간, 함께 킬킬대며 놀던 이브가 식물을 받아들고는 임무끝! 하고 정지상태로 들어간다. 갑자기 반응이 죽어버린 이브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빗속에서 우산을 씌워주다가 자신은 벼락도 맞고, 졈퍼케이블로 살려보려다 쇼크로 자빠지기도 하고. 알록달록 크리스마스 전구로 이브를 감싸 놓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말걸어보고. 그 순정이라니. 그러다 어느 날 이브를 내려놓고 갔던 우주선이 다시 와서 이브를 가져간다.
기겁을 해 따라가 죽기살기로 우주선에 매달려 쫒아 간 우주선속의 사람들은 어느 새 아무 것도 안하고 그저 코앞의 컴퓨터 스크린을 통해 대화하며 물개처럼 디룩디룩 살만 쪘다.이브를 찾아다니던 월이 덕분에 코앞의 스크린에서 벗어나게된 두 남녀는 코앞의 모든 것에 놀라며 함께 물장란도 할수 있게 되고 손잡고 말을 나눌수도 있게 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장악하는데 맛들여 사람들을 지구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오토파일럿 콤퓨터와 이런저런 싱갱이를 하는 과정에서 월-이는 이 한몸 바쳐 이브를 돕고 결국 콤퓨터의 장악에서 벗어난 인류가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컴퓨터가 편하기는 하다지만 나란히 앉아 따로 스마트폰을 보고있는 이즈음의 세태를 보면 정말 가슴깊히 생각케 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땅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 식물이 자란다는 그 신비. 그 신비를 잃고 산다는 게 사는 걸까? 점점 더 컴퓨터가 싫어지는 나는 아마도 더 이상 이 세상에 맞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카톡이 재밌다고도 하지는 내게는 여전히 책이 더 재밌다. 전화 계약기간이 끝나면 나는 이제 다시 예전의 전화로 바꾸려 한다. 텍스트 정도는 편리하지만 그 이상은 정말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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