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렸을 적에도, 그리고 지금도 아빠의 사랑을 그리워한다.오빠 넷에 나, 양념딸 혹은 고명딸이라며 고생도 안해보고 성장했을 거라 믿겠지만 오히려 남들보다 훨씬 더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한여름에도 아빠가 집에 계실 땐 발목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으면서 성장했다.
아빤 거의 매일같이 회식이라는 명분 아래 자정이 다되어 집에 오셨고 술이 거나하게 취해 들어오시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저녁 회식하는 날에도 아빠는 식사를 안하시고 자정이 넘도록 집에 와서 엄마를 피곤하게 하셨다. 잠에 깊이 빠져있던 난 아빠의 헛기침소리에 벌떡 일어나 “아빠 다녀오셨어요” 하며 정중히 인사드려야 했고, 졸음을 억지로 이기며 아빠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일어나 앉아 있어야 했다. 고기반찬은 보통 아빠의 밥상에 오를 때가 많았고, 아빤 졸음에 꾸뻑거리는 날 깨워서 고기 한점씩 억지로 먹여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셨다. 때론 아빠 무릎에 앉혀 놓고 “엄마가 좋아? 아빠가 더 좋아?”를 물어보시며 “아빠가 더 좋아” 대답을 듣기 위해 수없이 같은 질문을 하셨었다. 어렸지만 “두분 다 공평하게 좋아요”라고 대답을 했다. 내가 미국에 온다고 했을 때 아빠는 냉정하고 매몰차게 “미국에 가서 잘살아라. 편지도 쓰지 말고, 전화도 하지 말고, 엄마 아빠 살고 있는 곳은 쳐다보지 말고, 다시는 오지 말아라…”고 하셨다.
난 그런 나의 아빠가 몹시도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한데 몇년전부터 연로해진 아빠가 갑자기 많이 아프셨다. 전화 목소리도, 건강상태도 좋지 않았다. 혹시나 이번이 마지막 뵙는 걸까… 마음 조리며 급히 부모님을 뵈러 고국에 다녀오곤 했다. 사실 난 지금도 아빠의 사랑 표현을 이해 못한다. 왜 그런 방법을 택하셨는지… 참 안타깝다. 오랜 세월동안 본인 스스로 아파하셨고 그분의 사랑 방법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빠의 사랑의 표현방법과 그분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사랑은 꼭 말로 표현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난 사랑을 잘 표현할 줄 아는 것이 매일의 삶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을 잘 받아주는 것도 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녀에게, 가족에게, 친구, 동료, 이웃에게… 사랑을 표현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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