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30년만이었다. 숙이를 다시 만난 건.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숙이의 모습은 30년 전과 별 다름이 없었다. 꽃핀까지 꽂은 모습이 아직도 영락없는 소녀였다. 여전히 생기발랄하고 명쾌한 만년 소녀 숙이. 그 옛날 학창 시절, 스무 살 무렵에도 숙이는 다른 애들하고는 조금 달랐다. 나는 그런 숙이를 좋아했다. 그 옛날 한국에서처럼 숙이가 살고 있는 집까지 둘이서 팔짱을 끼고 걸어갔다. "숙아, 남들이 보면 우리 연애하는 줄 알겠다", "괜찮아, 괜찮아" 숙이는 서울에 있는 대학의 영문과 교수다.
공부하느라고 바빠서, 나이 마흔 하나에 결혼해서 마흔 넷에 아들을 낳은 정말 대단한 친구다. 숙이의 남편은 교육학 교수님이신데, 남편이 미국에 아들을 데리고 안식년을 나와 있다고 그래서, 미국에 있는 남편과 아들을 방문하러 왔다고, 숙이가 학과장이 되어서 엄청 바쁘다고, 그래서 곧 귀국해야 한다고 했다. 소시 적부터 명상과 요가에 심취했던 숙이에겐 지금도 영성과 종교가 가장 중요하다고. 그런 그녀가 영시를 전공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는 일상의 언어가 아닌, 영혼의 언어로 쓰여 진 것이니까. 종교학자였던 Joseph Campbell 에 따르면 시는 은유적 언어이며, 은유는 가시적 측면 뒤에 숨어있는 실제를 표현한다. 은유는 영원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숙이를 만나, 삼십 년 전 대학 시절로 돌아가서 Emily Dickinson 과 Shakespeare를 이야기 하고 맞벌이 아내 노릇과 또 늦둥이 엄마로서의 애로사항을 나누고 사람 좋고 친절하고 자상하기 짝이 없는 숙이의 남편과 숙이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똘망똘망한 숙이의 아들을 만나고 왔다. 30년 만에 만난 친구도 이렇게 반가운데,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우리 가족들은 얼마나 더 반가울까. 숙이는 알까, 내가 써 온 글들이 실은 훗날 천국에서 만날 우리 가족들과의 유일한 소통의 수단이었다는 것을. 숙이 교수님의 말씀대로 아니, 소시적 친구의 권고대로 계속 글을 써야겠다. 좋은 글을 쓰려면 쓰고 쓰고 또 쓰는 연습을 계속해야 한다는, 또랑또랑한 숙이의 이메일에서 마치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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