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인에겐 경의를, 가족에겐 안도를”, 실크햇·연미복 ‘신사들’의 운구서비스
▶ 미 남부 흑인장례식의 오래된 전통, 사우스 LA ‘보이드 장의사’가 도입
사우스 LA 소재 ‘보이드 장의사’의 전문 운구자들이 로즈힐 공원묘지에서 하관식을 마치고 고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고 있다. 맨 오른 편이 장의사 대표인 캔디 보이드.
사우스 LA의 작은 교회는 모자와 정장을 갖춘 일요일 차림새와 티셔츠와 청바지 들이 함께 섞여 꽉 차 있었다. 아내이자,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였던 한 여성의 장례식 - 오랫동안 소식 없었던 사촌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긴 기다림 끝에 배고픈 아이들의 시선은 부엌 쪽으로 옮겨지는 음식그릇을 따라가고 있다. 일순 조용해지며 문 쪽으로 눈길이 쏠린다. 말끔한 정장차림의 8명 신사들이 들어서고 있다. 한명은 틴에이저이고 나머지는 모두 성인 남자다. 검정색 실크햇에 연미복 코트, 오렌지 빛 타이와 오렌지 빛 베스트, 흰 장갑을 낀 그들은 가스펠 음악에 맞춰 천천히 일사 분란한 동작으로 춤을 추며 어깨 높이로 관을 메고 교회 중앙통로로 걸어 들어왔다. 이들은 프로페셔널 관 운구자(pallbearer) - 만가를 부르며 저승길을 인도하는‘LA의 상여꾼’인 셈이다.
그들이 소속된 보이드 장의사(Boyd Funeral Home)는 사우스 LA의 웨스트몬트 지역에 위치해 있다. 한 가정 연평균 중간소득이 약 3만1,500 달러이며 LA카운티에서 살인 발생률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하는 비즈니스가 생기게 마련이다. 1963년 이 장의사를 개업한 캔디 보이드는 성공을 위해선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흑인 장례식에서 죽음은 ‘귀향(homegoing)’으로 간주된다. 고단했던 삶,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도 하나님과의 재회를 기뻐하는 축하 의식 속에 녹아든다.
금년부터 보이드는 캐딜락 영구차량에 외부 스피커를 장착했다. 장례식으로 가는 동안 가스펠 음악을 울리며 ‘삶의 축하’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프로페셔널 운구자들을 선보였다. 비용은 패키지 장례비에 포함된다.
장례행렬이 교회를 나서면 운구자들은 관을 들어 올리고 흥겨운 음악에 맞춰 미소 띤 얼굴로 댄스를 시작한다. “오, 해피 데이. 오, 해피 데이. 주예수가 내 죄를 씻어주셨네, 씻어 주셨네. 주예수가 내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 오 해피 데이”성대한 의식은 고통을 덜어주는 위안이 된다, 남은 가족들에겐. 경의의 표시다, 죽은 자에겐. 누구나에게, 아무리 팍팍한 삶이었다 해도. 그리고 상여꾼들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조 잭슨이 이 장의사를 처음 찾아온 것은 13세 때였다. 보이드는 작은 채플의 청소를 맡겼다. 위풍당당한 영구차를 보고 마음을 빼앗겼던 5세 때부터 장의사가 되기를 원했던 잭슨은 죽음을 무서워한 적이 없다. 현재 16세 고교생인 그는 자신의 부음도 작성해 두었고 황금빛 손잡이가 달린 안은 푸르고 겉은 흰색의 관도 선택해 놓았다. 보이드 장의사의 8명 운구자들 중 가장 어린 그는 관위의 꽃을 배치하고 치우는 플라워 담당이기도 하다.
나머지 7명도 각각의 고달픈 사연을 말끔한 연미복 안쪽에 품고 있다.
일자리를 구하러 온 아서 야브로는 고향인 애틀랜타에서 해본 경험이 있다며 분장부터 시신 방부처리까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가을 어느 날 고향에서 서부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올라탄 그가 LA에 도착했을 무렵, 그의 수중엔 17달러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다운타운 LA미션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로 전락했다.
장의사를 운영하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어려운 인생살이에 익숙해진다 :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가족들,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 정교한 분장이 필요한 끔찍한 자상과 총상의 시신들…검시소에 시신으로 눕혀지기까지 수없이 잘못된 길로 들어 선 수없이 많은 슬픈 이야기들이다.
‘레이디 보이드’로 불리는 캐시 보이드는 겉모습이나 그가 처한 상황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야브로를 채용한 그는 운구 지망자들을 더 구해보라고 했다.
야브로는 LA미션에서 자신이 샤워할 동안 집을 맡아 주었던 노숙자 리카르도 벨트란(54)을 ‘스카웃’했다. 마약문제로 체포되어 복역하기 전 요리사로 일했던 친구다. 직업안내 센터에서 야브로의 구직성공담을 들은 마르테즈 길모어(32)도 합류했다. 어릴 시절부터 소년원과 그룹홈을 오가며 화학공장, 트럭운전, 텔레마케팅 등 온갖 일을 다 해보았던 길모어도 험한 거리에서 죽음과 가깝게 살아왔다.
하이스쿨 댄스 클래스와 ROTC에서 배운 경험을 되살려 가며 길모어는 운구팀의 안무와 훈련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빈틈없는 춤 솜씨와 절도 있는 운구동작을 위해 장의사의 차고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출발 전에는 티끌 하나 없는 양복부터 반짝거리는 구두까지 철저히 검사하고 한 장례식이 끝나면 자체평가를 통해 부족한 점을 개선한다.
이들에게 운구는 생계를 꾸려가는 직업이기 이전에 하나의 ‘소명’이다.
“우리를 보고 유가족들이 기쁨을 느끼면 나도 즐겁습니다. 이처럼 정장을 차려 입으면 내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긍정적으로 느끼게 되지요”라고 벨트란은 말한다.
야브로도 “이 일은 내게 긍지와 자존감을 준다. 나 같은 처지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보람을 느낀다”고 만족했었다. 그러나 몇 달 전 어느 날 그가 사라졌다. 한참 동안 리허설에도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몇 주후 돌아왔으나 그의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채워진 후였다. 아마 다시 거리의 노숙자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보이드는 실망했지만 놀라진 않았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고, 복잡한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연미복 정장의 프로페셔널한 운구자들은 미 남부 흑인들의 장례식 전통 중의 하나였다. 장엄하고 성대한 의식은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끝낸 나이 많은 흑인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위로이기도 했다. 보이드 장의사 운구자들의 춤과 노래는 이같은 전통에 약간의 창의성을 가미한 것이다.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쓰러져 통곡하던 딸이 있었다. 보이드 운구팀은 그 집 앞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울음을 그친 딸이 나와 손뼉을 치고 지나던 차들이 멈춰 섰으며 이웃과 행인들이 모여들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축하 의식’의 한 마당이 펼쳐졌다. 타계한 아버지는 가난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길을 따뜻하고 풍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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