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특히 캘리포니아에 살다보면 온화한 날씨… 자연환경 등 부족한 것이 없지만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외투를 걸치고 아무 때나 밤거리를 나설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처럼 눈오는 밤이 없다는 아쉬움이 가장 크다. 설레임도… 녹아드는 감성도 없는 사막의 메마름같다고나 할까. 밤에 내리는 그 탐미주의적 촉감… 가로등 아래서 함박눈을 맞으며 걷던 순간은 늘 한 폭의 명화처럼 떠오르는 그리움이기도 하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좋아하던 시절… 어느 못 생긴 여학생을 그리며 끝없이 밤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반 클라이번의 연주는 정말 환상 그 자체였다.
Van Cliburn… 20세기가 낳은 美 최고의 클래식(피아니스트) 아이콘, 반 클라이번이 2년 전(2013년)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그가 아직도 살아있었나했다. 그만큼 그의 이름은 현장보다는 음반 속에서나 살아 있었던 전설이었는데, 1958년 차이코프스키콩쿨 우승 후 욱일승천하던 그의 인기는 채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내리막 길을 걷다가 역사 뒤로 사라져 갔다. 많은 사람들은 클라이번이 졸지에 스타덤에 올라, (기대에 부응하려는) 압박감 속에 좌절한 케이스로 꼽곤하지만 사실 클라이번은 차이코프스키 1번, 라흐마니노프 3번외에는 이렇다할 연주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가 유명하게 된 것은 그가 위대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보다는 순전히 희소성 때문이었다.
금발머리의 미국청년 클라이번이 제 1회(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우승했을 때 세계는 경악했다. 냉전시대였던 당시, 소련은 체제 결속도 과시할겸 차이코프스키의 나라라는 자부감 속에서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쿨을 열었는데 1등상은 러시아가 따논당상 이라는 예상을 깨고 23세의 텍사스 출신 반 클라이번이 당당하게 1위로 입상… 일약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르게 된다. 전세계는 물론 소련은 큰 충격을 받았고, 미국에선 한방 먹였다는 쾌감 속에서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클라이번을 문화적 아이콘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를 환영하기 위해 뉴욕 브로드웨이에 무려 10만이 넘는 환영인파가 몰려들었다하니 당시 미국의 축제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를 연상하고도 남지만 클라이번은 3백만장이나 팔린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RCA판)을 뒤로 하고 점차 연주회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더 명확하게는 그의 연주력이 차이코프스키 이상은 넘지 못한 때문이었는데, 이는 다른 말로 풀이하면 이곡 하나 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불세출의 연주력을 보여주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반 클라이번의 연주를 들으면 누구나 미국적 로망… 그 감성적 매혹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치 거쉬인의 랩소디같다고나할까… 피츠제럴드의 소설이 그렇듯… 야망과 성취, 그리고 몰락의 우울한 재즈의 고향… 이 모든 것이 뭉쳐진 듯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대야망… 대륙적인 향수… 그리고 그 탐미주의적 도취… 이것은 유럽의 연주가들이 들려줄 수 없는 신선한 마력으로 전세계인을 사로잡았는데, 아마도 하나의 작품이 이처럼 한 사람에 의해 폭발적으로 달라질 수 있었다는 것도 반 클라이번이 유일무이하다할 것이다.
클라이번의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처음 들은 것은 청소년시기의 어느 한 때… 정확하게는 집에 있던 도시바 포터블 전축을 통해서였다. 전축기능은 예전에 망가져 사용 할 수 없었지만, 라디오 기능만큼은 여전해서 늘 빵빵한 소리를 들려주었는데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클래식 방송을 통해 들려오던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은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도 반 클라이번의 연주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환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차이코프스키가 울리던 늦가을… 그리고 겨울로 이어지던 그해… 그 때가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길고도 깊은 밤을… 수많은 책들과 함께 지새웠던 때였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잠시이기는 했지만 무언가 희망찬 미래가 해돋이처럼 밝아오리는 예감을 느끼게하는 찬미의 노래… 클라이번(의 협주곡)이야말로 어쩌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 그 탐미적 찬가를 위해 신이 보낸… 내 영혼의 첫 눈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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