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학습에 대한 불안이 엄청난 규모의 한국 사교육 시장 성장에 가장 큰 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며칠 전 TV 뉴스에서 한 학원 상담자가 초등학생 학부모에게 고교과정 수학을 권유하는 장면이 나왔다. 상담자는 “상당히 늦었으니 서둘러야 한다. 다른 아이들은 벌써 오래 전 시작했다”며 은근히 불안을 부추겼다. 학원은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질까 걱정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10여년 전 특목고라는 것이 생기고 명문으로 부각되면서 특목고 진학을 위한 선행학습 열풍이 달아올랐으며 이런 분위기를 학원들은 상술에 적극 이용하고 있다. 이른바 ‘불안 마케팅’이다. 과도한 선행학습의 부작용과 별개로 이런 추세는 얼마나 다양한 원인과 형태의 불안이 우리를 휘감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한마디로 경쟁지상주의다. 경쟁에서 처지는 것은 곧 실패와 낙오를 의미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용어조차 없었던 시절 에리히 프롬은 “입신출세하려는 끊임없는 투쟁과 실패하지나 않을까 하는 끊임없는 공포가 지속적인 불안과 스트레스를 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는 서구 자본주의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니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이 어떠할지는 말할 것도 없다.
선행학습에 대한 불안은 소비와 구매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다. 소비사회에서 불안 자극은 가장 효과적인 마케팅 툴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스마트폰 같은 테크놀러지 제품들이다. 자신들의 제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지게 될 것이라고 은근히 압박한다. AT&T의 4G 네트웍 광고에 등장하는 ‘Don’t be left behind’라는 슬로건이 바로 그렇다. 이런 문구는 보는 이들의 감정버튼을 눌러 댄다.
한국의 명품시장 활황에도 같은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특히 비슷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한국인들의 동조화 심리는 명품업체들에 더할 나위없는 마케팅 여건을 제공해 준다. 이것을 조금만 건드려도 매출은 쑥쑥 올라간다.
잘 사는 사람은 자기과시를 위해, 조금 못사는 사람은 무시당하지 않으려 명품을 사대는데 시장이 커지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중산층에서 점차 밀려나는데 따른 불안이 이런 형태의 소비로 표출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중심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한 사회의 서글픈 풍경이다.
소비시장의 불안 마케팅이 비교적 최근의 추세라면 종교와 정치 영역에서의 불안자극은 아주 오래된 고전적 기법이다. 특히 기복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종교는 신도들의 불안을 먹고 급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세와 징벌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종교 메시지이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불안을 주입하는 것은 정치권력을 다지고 지키는 데도 더 할 나위 없이 유용한 수단이 돼 왔다. 선거나 국민들의 관심을 호도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등장해 온 ‘북풍’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또 노사분규가 일어나면 언론들을 동원해 “이러다가는 선진국 진입이 좌절될 수 있다”는 식으로 은근히 국민들의 불안을 부추긴다.
적당한 수준의 자생적 불안은 노력과 분발을 촉진하는 건강한 감정이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주입되는 불안은 우리의 자율성을 흔들고 판단을 흐린다. 부정적인 작용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이런 불안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불안의 실체를 제대로 보면서 이에 휘둘리지 않는 분별력을 가진다면 좀 더 현명한 소비자, 좀 더 현명한 신앙인, 좀 더 현명한 유권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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