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여성 두 명이 지난달 30일 히잡을 쓰고 유권자 등록서를 든 채 남서부 항구도시 제다의 한 등록사무소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
히잡으로 온 몸과 얼굴을 가린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자말 알 사디가 지난달 16일 서부 메디나의 유권자 등록소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뻗었다. 소중한 듯 가슴에 품은 새하얀 종이는 그를 휘감은 검은색 천과 대비돼 더욱 눈에 띄었다.
그는 사우디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유권자 등록에 나선 첫 여성 시민이다. 자말은 현지 일간 사우디가제트에 “선거로 일어날 새 변화들이 너무나 기대된다”며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다.
중동 맹주 사우디의 여성들이 올 12월12일 치러질 지방선거에서 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한다. 이들은 2,000여명의 지방의회 의원을 뽑고 직접 선거에 출마할 수도 있다. 이번 선거에서 여성들의 참여와 활약이 보수 이슬람 국가 사우디, 나아가 중동 전체의 커다란 변화를 불러올지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여성 유권자 1,100만명, 역사적 첫 투표
사우디 당국은 18세 이상 여성 유권자 1,100만명의 등록을 위해 여성 공무원만을 배치한 등록사무소를 따로 설치했다. 이번 지방선거는 전국 284개 지역구의 총 1,236개 투표소에서 이뤄질 예정인데, 이 가운데 424곳이 여성 전용 투표소다. 선거에서 지방의회 의원 3,159명 중 3분의 2(2,106명)가 선출되고 나머지는 중앙 정부가 임명한다. 투표뿐만 아니라 선거 출마도 가능해진 사우디 여성들은 이제 선거에서 당선되면 지방의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같은 변화는 올 1월 타계한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세자시절이던 2005년 지방의회 선거를 처음으로 직선제로 바꾸면서 시작됐다. 1932년 건국된 전제군주국 사우디는 이 때까지도 이슬람 율법에 따라 여성의 정치 참여를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나 압둘라 전 국왕은 2011년 이슬람 국가 중 유일하게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던 자국의 방침을 바꿔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모두 부여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선대 국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치ㆍ사회 개혁정책을 펼쳐 온 압둘라 전 국왕의 성향이 크게 작용했지만, 2011년 초 촉발한 중동 민주화운동 ‘아람의 봄’도 한 몫 했다.
압둘라 전 국왕은 당시 “이슬람 법학자 울라마를 비롯한 다른 성직자들과의 논의를 통해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부합하는 모든 역할에서 여성을 배제하지 않기 위해 참정권을 주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3년 1월 압둘라 전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국정자문기구 ‘슈라 위원회’ 설립 규정의 2개 조항을 개정해 전체 150명 위원 가운데 20%를 여성에 할당하도록 하고 여성위원 30명을 새로 임명했다. 여전히 위원회 내부에서 남성과 여성 위원의 좌석은 물론 출입문까지 엄격히 분리되고 있지만, 여성 위원들은 각 상임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며 남성 위원과 동등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보수적 시각 여전, 발걸음 더뎌
하지만 수년 간 쌓아온 기대와는 달리 사우디 각지의 유권자 등록소로 향하는 여성들의 발걸음이 더디다. 이달 14일 마감되는 유권자 등록에 8일 현재까지 투표를 하겠다고 신청한 여성은 전체 여성 유권자의 10%도 안 된다고 사우디 가제트는 전했다. 대표적으로 290만 인구에 선거구 10개를 보유하고 있는 제다 지역의 경우 여성 약 1,100명만 유권자 등록을 했다.
지난달 30일 시작해 오는 17일 종료되는 여성 후보자 등록 역시 활발하지 않다. 2,100여명의 의원을 뽑는 만큼 여성 입후보자가 200명은 거뜬히 넘어설 것이라는 현지 언론들의 전망과 다르게 현재까지 출사표를 던진 이들은 100명에도 못 미친다.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여성 참정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폐쇄적인 사우디 문화가 있다. 유권자 등록을 위해서는 거주 증명이 필요한데, 여성의 거주 증명을 담당하는 남편이나 아버지가 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지역 평등연구가로 활동하는 수아드 아부 다에는 가디언에 “결국 여성들의 참정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남성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남성 동반자가 없으면 여성들은 유권자 등록을 위해 집을 나설 수 없고, 특히 운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물리적인 장애가 따른다”고 지적했다.
■‘구조부터 바꿔야’ ‘그 자체로 성과’ 평가 엇갈려
세계 경제포럼이 최근 발표한 ‘2014 세계 성평등지수’에 따르면, 조사대상 142개국 중 사우디아라비아는 130위로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사우디 여성들은 엄격한 복장을 강요받고 운전이 법적으로 금지된다. 여행에 나서거나 직장에 다니려는 여성은 남성 보호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한해 사우디 대졸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임에도 불구, 여성 취업률은 13%에 불과하다. 심지어 법정에서 남성 한 명의 증언은 여성 둘의 증언과 맞먹는 효력을 가질 정도로 남녀의 위상차가 크다.
이 같은 사우디의 상황을 지켜보는 전문가들 다수는 압둘라 전 국왕의 결정은 환영하지만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며 비관하고 있다. 미 세계인권감시단체 프리덤 하우스의 바네사 터커 부소장은 CNN 기고를 통해 “극도로 폐쇄적인 정치 시스템 안에서 여성이 정치활동을 시작해 봤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면서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고 지적했다.
국제 엠네스티 중동부문 차장 필립 루터도 “현재로서 사우디는 여성 참정권에 있어 가장 초보단계에 있는 데다 변화 속도도 너무 느리다”며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군에서 빠져 나왔다는 선언적 의미 이상의 성과가 나올지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강경 이슬람 국가인 사우디가 변화의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에 의미를 크게 부여하는 이들도 적잖다. 특히 압둘라 전 국왕과 달리 보수 강경파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새 국왕이 여성 참정권 실현방침을 철회하지 않은데 대해 기대를 걸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여성의 참정권 확대는 사우디 발전을 위한 중요한 한 걸음”이라며 “강경 보수성향의 살만 국왕이 여성 후보의 입후보를 반대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음에도 압둘라 전 국왕이 이끈 여성인권 개혁은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환영했다.
사우디 저널리스트 사브리아 자와르는 아랍뉴스를 통해 “작은 움직임부터 시작하면 다음 세대 사우디 여성들이 나라에 미칠 영향력은 훨씬 커질 것”이라며 “일부 보수세력은 여성들이 선택권을 갖게 됐다는 것의 의미를 평가절하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사우디가 중동 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만큼 주변국의 정치지형 변화를 초래할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린다. 사우디의 여성 인권운동가인 하툰 알 파시 킹사우드대 교수는 가디언에 “남은 기간 여성들이 최대한 유권자, 후보 등록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게 관건”이라며 “사우디의 변화는 곧 중동국가 전체 변화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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