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목표로 한 최악의 테러참사가 발생하면서 프랑스의 정신으로 지칭돼 온 ‘똘레랑스’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됐다. 다름과 차이에 대해 관대한, 그래서 무슬림이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프랑스이지만 잇달아 야만적 테러의 표적이 되면서 관용의 전통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이번 테러는 프랑스적 가치관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을 터. 프랑스 사회는 테러 이전보다 한층 더 살벌해질 것이다.
그러나 테러범들은 이번 공격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던 일반인들을 목표물로 삼음으로써 테러를 ‘남이 아닌 나를 겨냥하는 현실적 위협’으로 확실히 각인시킨 것이다.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던 파리 시민들이 이상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긴장하고 혼비백산하는 모습은 테러 공포의 확산을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파리에서 테러 만행이 발생하자 프랑스는 물론 미국 등 다른 서방국가들도 철저한 응징과 근절을 공언하고 나섰다. 그동안 얼마나 무수히 들어왔던 다짐인가. 하지만 테러와의 오랜 전쟁에도 불구하고 극단주의라는 괴물은 박멸되기는커녕 오히려 몸집을 불리고 한층 더 포악해지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 테러를 키우는 자양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반문명적 만행의 근원은 이슬람권의 집단적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세워지면서 자신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난 일을 ‘재앙’(nakbah)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런 집단적 기억은 중동지역의 피비린내 나는 분쟁을 통해 무슬림들 사이에 확산돼 왔다.
개인적 기억은 죽음과 함께 소멸된다. 그러나 집단적 기억은 너무나도 끈질겨서 쉽게 치유되거나 뿌리 뽑히지 않는다. 오히려 후손들에게 전승되면서 고통과 수치로 기억되고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고가 된다.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에 의해 자행된 알바니아계 무슬림 대학살은 집단적 기억의 무서움을 실증해준 사례이다. 이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인사를 나누며 사이좋게 지내던 이웃들이었다. 이런 끔찍한 증오의 원천이 된 것은 600여년 전 이슬람에게 치욕적 패배를 당했던 역사에 대한 세르비아계의 집단적 기억이었다. 내전이라는 현실이 집단적 기억이라는 화약고에 불을 붙인 것이다.
이렇듯 극단주의와 극단적 만행은 항상 기억과 참혹한 현실이 결합하면서 탄생하고 기승을 부린다. 2000년대 들어 극단주의가 한층 더 날뛰는 배경에는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유럽국가 무슬림들의 실업률은 일반 실업률의 두 배가 넘는다.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차갑다. 특히 이번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무고한 무슬림들까지 잠재적 테러범으로 바라보게 되고 이들의 소외와 분노는 커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테러는 모든 이들의 분노와 증오를 증폭시킨다. 그러면서 악순환은 계속된다.
테크놀러지의 눈부신 발전도 테러 확산에 한몫 하고 있다. 테러범들 간의 커뮤니케이션과 테러무기 제조 등이 손쉬워지면서 테러 수법과 조직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문명이 반문명적 야만을 촉진시키는 모순의 시대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테러 근절과 발본색원은 이제 더 이상 현실적 목표라 할 수 없다. 테러는 마치 독감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돼 버렸다. 완전박멸은 불가능하고 단지 어느 정도의 예방과 관리만 가능할 뿐이다. 균형 잡힌 외교정책, 그리고 불평등과 차별의 해소 등을 통해 국제질서의 체질을 개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히 방비하는 수밖에 없다. 우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파리 테러에 대해 “작은 3차 대전의 일부분”이라고 지칭했다. 그런데 문제는 1·2차 대전과 달리 이 전쟁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IS 본거지에 대한 무차별 보복폭격을 보면서 통쾌함보다 걱정이 앞서는 이유다.
<
조윤성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