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유서 깊은 궁에는 자기(磁器)를 전시해 놓은 공간이 있다. 베르사유 궁전의 트리아농(Grand Trianon) 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절대 왕권을 자랑했던 각 국의 왕족들이 막대한 부와 권력을 쏟아 조성한 궁에 도자기를 위한 전시 공간을 따로 두었다는 것은 당시 도자기가 지닌 위세품(威勢品)으로서의 성격을 반영한다.
17세기 전후, 폭발적인 관심을 받은 동양의 자기는 유럽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열렬한 수집의 대상이 되었고, 각 왕실에서는 경쟁적으로 도자기를 구매하고 전시했다. 단단하고 반짝이는 자기는 한 해에도 수 만 건씩 수출되는 중국 최고의 무역품이 되었고, 급기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명과 도자기 혹은 자기를 지칭하는 명사를 모두 “차이나 China”로 쓰게 되었다. 한 국가의 명칭이 특정한 대상을 뜻하는 단어로 확장되었다는 것은 당시 그 대상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진 무역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전에 쉽게 접해보지 못했던 자기에 대한 열광은 유럽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자기를 매개로17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 불리는 중국 취향이 퍼져 나갔고, 도자기 뿐만 아니라, 가구, 직물, 심지어 건축에 이르기까지 중국 취미 혹은 중국풍 모티브가 크게 유행하였다. 중국풍 애호 경향은 이국 취향을 반영한 로코코미술의 발전으로 이어지며 화려한 궁중 문화를 꽃피워 냈다. 몇몇 권력가들은 자기를 직접 제작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며 자기 생산 체계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곧 유럽에서 자기 제작을 시작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유럽 최초의 경질자기(硬質磁器)는 1709년 독일에서 제작되었다. 평생 5만점 이상의 아시아 자기를 수집했던 작센 주의 선제후 아우구스투스 2세(Augustus the Strong, 1670-1733)는 자기 제작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지원을 받은 화학자이자 연금술자 요한 프레드리히 뵈트거(Johann Friedrich Bottger, 1682-1719) 등은 독일 작센과 체코 보헤미아의 경계에서 고령토와 유사한 흙을 찾아내면서 유럽 최초의 자기 생산에 성공했고, 곧이어 본격적으로 자기를 생산해 내기 위한 왕립 자기 공장이 설립되었다.
1710년에 문을 연 마이센 도자제작소(Meissen, Porzellan-Manufaktur)가 그것이다. 마이센에서 발견한 자기 제작기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등에서도 특색있는 자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 역시 자기문화권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일찌감치 청자 및 백자를 발달시키며 자기 문화를 향유했던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 수 백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도자기를 중심으로 동서의 무역이 일어나고, 또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던 일련의 흐름은 호놀룰루미술관 전시실 한 곳에 설치된 유럽의 자기 코너에서 살펴볼 수 있다. 18세기 유럽미술을 소개하는 공간 한 쪽 벽을 가득채운 각양 각색의 도자기가 유럽 왕궁이 앞다투어 장식했던 자기의 방을 재현하며, 동서양 문화 교류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 가 영
호놀룰루미술관 아시아부 한국미술 담당
한국국제교류재단 파견 객원 큐레이터
<고송문화재단 후원>
<
오가영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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