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지구를 지켜라’
9일 개막한 창작 연극 '지구를 지켜라'는 동명영화(2003)의 자장(磁場)을 무대 위로 현명하게 구현한다.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양봉업자 '이병구', 안드로메다 PK-45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라 여겨져 병구에게 납치돼 고문을 당하는 유제화학 사장 '강만식'간 일촉즉발은 고장난명(孤掌難鳴) 격이다.
영화에서 광기와 ‘똘기'로 똘똘 뭉친 신하균의 병구와 살기 위해 ‘미친 짓'을 감행한 백윤식의 만식은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고 그것이 극의 원동력이었다. 병구의 광기를 지구의 N극, 그의 똘기를 S극으로 비유한다면 연극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은 S극에 좀 더 가깝다. 병구와 만식의 똘기에 기반한 웃음에 더 비중을 실으며 영화보다는 유쾌한 자력이 더 세다.
출연 배우들의 이미지와 매력이 자기력의 강도를 세게 만든다. 개막 당일 오후 6시 공연의 만식은 지현준이었다. ‘에쿠우스' ‘시련' ‘빛의 제국' 등 진지함으로 기억되는 지현준 맞다. 그가 흰 셔츠에 박서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있거나 꽃무늬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망가진 얼굴로 무대를 누빌 때, 털이 무성한 다리로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못지 않은 동작들을 선보일 때 객석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본인 역시 연신 터지는 웃음를 참지 못했는데, 연극 공연 안의 실수를 넘어 그와 관객들이 오히려 더 즐길 수 있는 촉매제가 됐다. 진지한 역에서 대사 실수 하나 없는 그다. 이 회차의 병구 이율 역시 평소 4차원의 면모를 유감 없이 뽐낸다.
또 한 명의 발군은 원맨쇼에 가까운 육탄전을 벌이는 육현욱이다. 병구를 쫓는 추 형사를 비롯해 10개 배역을 소화하는 그는 뮤지컬 ‘김종욱 찾기'의 멀티맨 못지 않게 다양한 캐릭터로 변신하며 극에 리듬감을 심는다. 병구를 돕는 서커스단 출신 ‘순이' 역의 함연지는 순수한 매력을 끄집어내며 극에 녹아들어간다.
다만 이로 인해 원작 영화에서 광기 서린 그로테스크함과 으스스한 기운은 줄어들었다. 병구가 외계인으로 여기는 만식은 사회의 부조리를 총집결시킨 인물이다. 큰 기업체의 사장이자 경찰총장의 사위, 총선에서 여당인 신민당 후보 등 돈과 백, 권력을 모두 움켜쥔 인물이다. 공장의 가스 누출로 자신의 어머니를 병들게 만든 그가 외계인이라고 병구는 믿는다. 지구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악행을 일삼는 그를 상대로 지구를 지키려는 것이다.
연극에서는 이 부분을 다루기는 하나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웃음보다 페이소스의 농도가 옅다. 극본을 쓴 조용신 작가와 각색도 겸한 이지나 연출은 비교적 담백함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무대에서 까발리지 않아도 영화 같은 현실의 부조리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100분 동안 한 없이 웃고나면 그 사이 스쳐지나갔던 사회적 이슈들의 자장 안에 갇힌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에 영화에서처럼 외계인 왕자는 지구에 희망이 없다며 폭발시킨다. 서숙진 무대 디자이너와 정재진 영상디자이너가 특별한 소품 없이 우주선의 밑둥을 떠올리게 하는 커다란 배경 세트와 영상 만으로 만든 무대는 모던함과 동시에 키치함을 뽐낸다.
5월29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시어터 1관. 이병구 정원영·이율·샤이니 키, 강만식 지현준·강필석·김도빈, 순이 함연지·김윤지. 프로듀서 이성일, 원작 장준환 영화 ‘지구를지켜라', 극본 조용신, 각색 겸 연출 이지나, 음악감독 김성수, 세트디자이너 서숙진, 영상디자이너 정재진, 음향 김필수, 조명 정구홍. 4만5000~5만5000원. 페이지1·클립서비스·프로스랩. 1577-3363
<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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