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큼 단단해지고 농익었으면서도 원류는 변하지 않은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오래다.
1970년대 디바로 37년 만에 새 앨범 ‘37'를 발매한 가수 겸 화가 정미조(67)가 10일 오후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펼친 데뷔 44년 만의 첫 단독 콘서트 ‘37'은 그립고 벅차고 그래서 놀라웠다. 2시간10분의 러닝타임 동안 정미조는 게스트인 가수 최백호가 들려준 2곡을 제외한 18곡을 오롯이 소화하면서 37년의 공백을 무색케 만들었다.
발라드, 탱고, 블루스, 보사노바를 수시로 오간 정미조의 음색은 ‘고급 성인가요'의 기품이 여전히 벼려있음을 확인케 했다. 첫 곡인 ‘휘파람을 부세요'부터 심상치 않았다. 여전히 우아한 정미조의 목소리는 뭉근하게 울려퍼지며 LG아트센터 1,000석을 가득 채운 팬들의 귓가를 따듯하게 감싸안았다.
흰색 정장을 입고 스카프를 두른 채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정미조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상당한 고음이 요구되는, 잔잔함 속에서도 바다의 파도처럼 변주가 잇따라 펼쳐지는 ‘파도'에서는 변화무쌍한 음색을 선보였다. 새 앨범 ‘37'의 타이틀곡 ‘귀로'는 심장을 지긋이 눌러왔다. “어린 꿈이 놀던 들판을 지나, 아지랑이 피던 동산을 너머"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어딘가에 있을 향수를 느긋이 자극했다. 이번 앨범을 프로듀싱한 색소포니스트 손성제(호원대 교수)가 작곡하고 음반제작사 JNH뮤직의 이주엽 대표가 작사한 곡으로 정미조의 자전적 사연을 노랫말에 담았다. 어쿠스틱 기타 반주 위로 정미조가 담담하게 인생의 회한을 노래했다.
처음에는 “아이들 노래 같아 부르기가 꺼려졌다"는 보사노바 풍의 '7번 국도'도 정미조의 음색에 찰싹 달라붙었다. 김연수의 소설 제목으로도 기억되는 ‘7번 국도'는 동해안, 즉 해안에 인접한 도로다. 드라이브에 어울리는, 살랑거리는 멜로디와 리듬이 인상적이다. 정미조의 보사노바는 리사 오노의 팝스런 보사노바, 나희경의 서정적인 보사노바와 달리 무르익은 맛이 있었다.
고상지의 반도네온 소리와 함께 들려준 두 개의 탱고곡 ‘낙타'와 '인생은 아름다워'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을만큼 멋스러웠다. 탱고 선율의 움츠러들었다 폈다 하는 기운을 절묘하게 포착하는 능력은 한동안 가요계를 떠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1979년 가요계를 벗어나 유학한 프랑스에서 정미조가 즐겨 들은 샹송인 이브 몽탕의 ‘고엽'(les feuilles mortes)과 자크 브렐의 ‘날 떠나지 말아요'(ne me quitte pas)는 팬들에게마저 아득함이 밀려오게 만들었다. 김소월의 시에 작곡가 이희목이 멜로디를 붙인 정미조의 대표곡 ‘개여울'의 “당신은 무슨일로 그리합니까 홀로 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라는 노랫말이 흘러나올 때 모두 가슴에 손을 얹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데뷔 방송인 1972년 TBC ‘쇼쇼쇼' 출연 당시 불러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는 애절했다. 이 곡의 반주가 흘러나올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해는 기울고 그림자는 길어졌지만 오늘만큼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 지 모르겠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가보려 한다. 함께 가달라"고 팬들에게 청하기도 했다.
화가 정미조가 그린 ‘몽마르트르' 등의 그림이 스크린에 스쳐지나기도 했다. 손성제와 고상지를 비롯해 앨범 ‘37'에 참여한 세션이 그대로 오른만큼 사운드의 질도 수준급이었다.
송창식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한때 금지곡이었던 ‘불꽃'이 마지막 앙코르로 울려퍼졌다. 정미조의 노래에 대한 열정 역시 불꽃처럼 타올랐다. 정미조와 함께 1970년대로 돌아간, 대부분 50대 이상의 팬들은 밤 늦게까지 이어진 그녀의 사인에 밤을 불살랐다.
<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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