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분이었다.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겠지만 어린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나는 빨래하는 할머니 옆에서 기역, 니은을 가르쳐드리기 시작했다. 글을 몰라 많이 답답하셨던 할머니는 내게 처음 배우던 날 얼마나 감격하셨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할머니는 답답함보다 문맹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긴 세월 자존감마저 상처받았을지 모른다. 할머니는 교회에 가서 성경 구절을 한 번이라도 시원하게 읽어 보는 것이 소원이셨다.
만주에서의 어린 시절과 일제 강점기, 6.25와 월남, 그리고 부산에서의 피난시절에 이어 빨래터에서 어린 손녀딸에게 기역 니은을 배우는 순간까지... 할머니 가슴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었을까.
한국의 산업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변화가 할머니의 삶에도 찾아왔다. 제일 먼저 빨래비누의 혁신이 놀라웠다. 할머니는 거품 잘나고 때 잘 빠지는 하얀 비누를 보자 좋아서 눈물을 보이실 정도였다. 어린 나는 무엇이 할머니로 하여금 눈물까지 나게 했는지 몰랐다. 한참 뒤 양은솥이 나왔을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것 우리 엄니 갖다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그날 나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혼잣말이 가슴에 박혔다. 할머니도 엄마가 있었고 그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에 놀랐다. 좋은 세월, 편한 것을 혼자 누리는 것에 대해 어머니에게 미안해하는 할머니의 가슴이 읽어졌다.
아직도 문득 문득 그 장면에 머무는 내 모습을 본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지도 생각해 본다. 먼 훗날 아이들은 새로운 것, 좋은 것 보면서 나를 기억하는 순간이 있을까? 그냥 피식 웃음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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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희 / SF 세종한국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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