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카토(Cato the Younger)는 시저의 영원한 정적이었다. 이름 앞에 ‘소’가 붙은 것은 로마의 숙적 카르타고 멸망에 앞장 선 증조 할아버지 ‘노’ 카토(Cato the Elder)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이 카토는 장시간 연설하는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그는 이 재주를 시저의 야심을 견제하는데 이용했다. 기원 전 60년 시저가 지금의 스페인에서 승전고를 울리고 돌아오자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승전 행진을 허락했다. 그 해 시저는 로마 집정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문제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다는 규정이었다. 시저는 원로원에 예외 조항을 만들어 통과시켜 달라는 청원을 올렸다.
이 안건이 상정된 날 카토는 자정까지 연설을 계속했다. 로마 법은 해가 지기 전까지 모든 공무를 마치도록 하고 있었다. 시저의 청원은 부결됐고 시저는 승전 행진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필리버스터’라는 이름은 붙지 않았지만 역사에 기록된 첫 필리버스터 사례라 할만 하다. 카토는 훗날 시저 암살에 가담하며 시저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잡은 후 끝까지 항전하다 결국 자살한다.
‘필리버스터’라는 단어는 원래 ‘해적질 하다’는 뜻의 네덜란드 말에서 왔다. 나중에 해적이 순항하고 있는 배의 진로를 방해하듯 의사 진행을 방해한다는 뜻으로 의회에서 장시간 연설함으로써 마음에 들지 않는 법안 통과를 막는 것을 의미하게 됐다.
미국에서는 연방 상원이 예산안을 제외한 모든 안건의 경우 재적 의원 60%의 찬성으로 필리버스터를 종식시킬 수 있는 규정을 둠으로써 이것이 원내 소수당이 다수당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변했다. 재적 의원 100명 중 60명의 찬성 없이는 이를 끝낼 수 없고 결국 법안 통과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연방 하원은 단순 과반수로 필리버스터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상 무의미하다.
이 제도의 취지는 다수당도 소수당과 의견을 조율해 타협의 정치를 하라는 것이지만 이는 서로 대화가 통할 때 이야기고 요즘 같이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된 상태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실제로 2013년 공화당의 필리버스터에 분노한 해리 리드를 위시한 민주당 상원 지도부는 연방 대법관을 제외한 모든 고위직 인준을 단순 다수결로 의결할 수 있도록 규정을 고쳤다.
안토닌 스칼리아 대법관 사망으로 공석이 된 대법관 자리를 놓고 공방을 벌이던 공화당과 민주당의 전투가 결국 대법관 인준도 단순 과반수로 결정하는 소위 ‘핵 옵션’ 선택으로 끝날 모양이다. 트럼프가 대법관 후보로 지명한 닐 고서치 인준에 대해 민주당 지도부가 필리버스터를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고서치의 대법관 자격에 대해서는 양당과 법조계 어디서도 별 이론이 없다. 민주당은 작년 오바마가 대법관으로 지명한 메릭 갈랜드 인준을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이 아예 표결에도 부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를 아직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자격이 충분한 갈랜드를 그 자리에 앉히지 않았으니 고서치도 못 앉히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화당은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일 때 고위 공직자 인준의 필리버스터를 봉쇄한 전례에 따라 연방 대법관의 경우도 이를 없애겠다고 맞서고 있다. 공화당은 고서치만한 자격을 갖춘 인물을 인준하지 못한다면 누구를 지명해도 소용 없다는 입장이다. 이념의 양극화와 함께 미국에서도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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