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외계와의 조우… 정복할 것인가, 존중할 것인가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어슐러 르 귄의 인류학적 SF
인류학자 동화작가 딸로 태어나
3대 판타지 ‘어스시’의 세계 창작
절대적 선악 존재 않는 세계관
타자에 대한 존중 체험케 해
1911년 8월29일, 캘리포니아의 작은 마을 오로빌에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이 나타난다. 1860년대의 골드 러시 당시 백인들에게 멸종한 줄 알았던 야히족(나중에 야나족으로 밝혀진다)의 생존자였다. 48년간이나 협곡의 곰의 은신처에 숨어 살다가 부모형제와 같은 방식으로 죽기 위해 백인의 목장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학살의 시기가 좀 지난 탓에, 그는 살해되는 대신 대학 인류학 박물관에서 수위로 일하며 살아있는 유물로 전시된다. 그는 박물관에서 돌화살 만드는 법, 불 피우는 법, 사냥하는 법 등을 자료로 남겼고, 5년 뒤 1916년 3월25일, 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의 문화에서 낯선 이에게 이름을 말하는 것은 금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사람’을 뜻하는 ‘이시’로 자신을 불렀다. 문명에 속하기를 거부하며 영어조차 배우지 않았다.
그를 도운 사람은 저명한 인류학자 알프레드 크로버였고, 이 이야기는 1961년 그의 아내인 동화작가 디어도어 크로버의 저서 ‘두 세계의 이시’(한국어판 ‘마지막 석기인 이시’ ‘마지막 인디언’)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이 책은 100만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된다.
부부의 딸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 그녀는 작가가 된 뒤 언어에 힘이 담긴 세계관을 창조한다. 모든 물건에는 진짜 이름이 있고, 진짜 이름을 알면 그를 구속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는 진심으로 믿는 이들 외에는 진짜 이름을 알리지 않는다. 후에 ‘나니아 연대기’ ‘반지의 제왕’과 함께 세계 3대 판타지로 불리는 ‘어스시(Earthsea)’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어슐러 르 귄의 SF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르 귄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게드전기’는 그의 아들이 감독을 맡았다. 쇼박스 제공
■인류학의 시선으로 우주를 보다
어슐러 르 귄은 어린 날을 인류학자인 아버지의 목장에서 무수한 다른 문화의 손님들을 만나며 지냈다. 전 세계로부터 온 망명자를 만났고 미 원주민과도 가족처럼 지냈다. 그녀는 ‘타자’와 함께 한 경험이 무엇보다 큰 선물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녀는 한쪽 세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배척받지만, 온전히 다른 형태의 생생한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체화하며 자란다.
1974년에 발표된 장편 ‘빼앗긴 자들’은 르 귄의 이런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은 우라스와 아나레스라는 마주보는 두 쌍둥이 행성을 배경으로 한다. 각기 소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표방한 두 별은 오랫동안 교류가 단절되어 있었지만, 한 명의 아나키스트가 두 행성을 오가며 소통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주인공 쉐벡은 단순하게 질문한다. “그들이 그토록 메스껍고 더럽다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우라스는 소유주의를, 아나레스는 공동체주의를 표방하는 별이지만 각자의 모순을 안고 있다.
짐작하시다시피 우라스는 자본주의, 아나레스는 공산주의를 상징한다. 단지 르 귄의 아나레스는 실제 역사에 있었던 스탈린식 독재주의가 아니라, 옛 철학자들이 상상한 무정부-공동체적 사회주의다. 이 소설은 현실의 역사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각자의 이상을 어느 정도나마 구현하여 교류하는 세계에 대한 사고실험이다. 미소냉전이 한창이었던 무렵에 쓰여진 이 소설은, 우라스와 아나레스처럼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나라에 사는 독자로서 남다른 관점을 체험하게 해 준다.
■타자에 대한 존중을 말하는 SF
이 작품은 르 귄의 ‘헤인’ 시리즈 중 한 편이다. 헤인 세계관은 우주 전역에 다양한 문화의 행성이 있으며, 그들은 과거에는 고도로 발달한 종족인 헤인인 아래 연결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를 잊고 각자 발전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녀의 소설에서 헤인인은 정복자나 수탈자가 아니라, 주로 관찰자이자 이해자로 등장한다. 르 귄의 우주에서 절대 악을 물리치는 영웅담이나 정복과 승리의 서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지구에 묶여 사는 우리로서는 체험하기 힘든 가상의 다른 문화를 보여주며, 이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경험을 통해 현실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이런 르 귄의 사회과학적 사고실험은 ‘어둠의 왼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게센 별 사람들에게는 성별이 고정돼 있지 않다. 이들은 26일을 주기로 성별이 바뀐다. 계속 남자의 모습을 한 연합인 겐리는 게센인 눈에는 변태나 성도착자로 보인다. 겐리는 게센인을 여자 같은 남자로 생각해야 하는지, 남자 같은 여자로 생각해야 하는지, 동료와의 감정이 우정인지 사랑인지 계속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한 권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겐리는 오히려 인간의 성별을 나누어보아야 하는 자신의 세계에 낯선 감정과 혼란을 느낀다. 이는 이 책을 함께 따라간 독자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감각으로, 젠더의 구분에 대한 생각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해주는 걸작이다. 소설이 쓰여진 1968년에는 더욱 혁명적인 시각이었다.
르 귄은 도가 사상에 심취해 노자의 도덕경 번역에 참여하기도 했다. 같은 세계관 작품 중 하나인 ‘환영의 도시’에서는 성서가 아니라 도덕경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경전이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는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으로 부르면 그 이름이 아니다”라는 도덕경의 유명한 첫 구절은 세상에 진실이 하나만 있지 않음을 말하며 생각이 고정되는 것을 경계한다. 모든 가치에 의미가 있으며, 다양성을 다양성 그대로 바라볼 것을 말한다. 이 구절은 우아하고 따듯한 시선으로 모든 다양성의 가치를 말하는 거장의 세계관에 여러모로 어울린다. <김보영 SF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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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
1929년 10월 21일~. 저명한 인류학자 알프레드 크로버와 동화 작가 디어도어 크로버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2년 이래 지금도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인류학과 심리학에 근거한 문화실험적인 성격이 강하다. SF, 판타지뿐 아니라 다방면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SF작가가 노벨상을 탄다면 첫 번째 후보일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 1979년 과학소설연맹으로부터 간달프상을 수상했고 2003년 미국 과학소설작가협회가 주는 제 20대 그랜드마스터로 선정되었다.
어슐러 K. 르 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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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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