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재단서 15년간 회계담당, 어카운트의 귀재로
이민 2년만에 사업결심...근면.성실로 동종업계 2위로 키워
10년간 불우학생에 장학금.지역 문화행사 지원
낫소카운티‘올해의 커뮤니티 봉사상’수상
1999년 이민 후 오로지 ‘근면 성실’ 하나로 사업체를 일구고 10년 전부터는 남몰래 이웃을 돕고 있는 럭키 서플라이(Lucky Supply. Inc.)사 신범조 대표가 지난 5월 롱아일랜드 낫소카운티가 선정한 올해의 커뮤니티 봉사상을 받았다. 가장 바람직한 이민 자영업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각종 행사 뒤에서 도와
지난 5월12일 롱아일랜드 낫소카운티 청사에서 열린 ‘아시안 아메리칸 헤리티지’ 행사에서 올해의 커뮤니티 봉사상을 수상한 럭키 서플라이(Lucky Supply.Inc)사 신범조 대표, 지난 10년간 롱아일랜드 학부모협회, 리즈마 파운데이션 등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지역의 문화행사 등을 후원해온 공이 크다.
2017년 1월에는 뉴욕한인이민사박물관 건립기금으로 1만달러를 기부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김민선 뉴욕한인회장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눈으로 보니까 돕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더라. 그래서 조그만 힘을 보탰을 뿐이다” 며 뒤로 숨는 그지만 그는 지난 2010년 센서스 당시 한 사람의 한인이라도 더 인구조사에 참여하도록 센서스 홍보도 조용히 도왔었다.
신범조가 이렇게 한인사회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에 온 지 2년만에 자신의 자영업을 시작하고 개미처럼 성실하고 부지런히 일해 온 결과이다. 빈손으로 와서 피땀 흘려 가꾼 사업체가 자리를 잡았다고 모두가 한인사회 봉사를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인사회와 멀리 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한인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직접 해결해 주고 있다.
그가 대표로 있는 럭키 서플라이는 컵, 컨테이너, 플라스틱, 페퍼 백 등의 비닐봉투/ 포장재료를 취급하며 도매상 80%, 소매상 20%를 상대로 홀세일을 한다. 같은 업종으로 1위는 미국업체 임페리얼이고 2위는 럭키 서플라이일만큼 규모가 크다. 퀸즈 매스페스에 위치한 7만 스퀘어 피트 면적의 창고에는 쉴 새 없이, 창고가 터져나갈 정도로 물건 입고 및 출하량이 많다.
▲밴 한 대, 1,000달러로 시작
신범조는 1961년 2남2녀 중 막내로 서울에서 태어나 덕수상고에 다니면서 주산과 부기에 능했고 고2때 조흥은행에 특채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81년 단국대학교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재학 중 연세대 재단에서 일하게 되면서 경영학과로 바꿔서 야간에 수업을 들으며 대학을 졸업했다.
연세재단의 7개 병원, 연세대학교, 연세 건물 등 1년 1조원 정도의 예산 및 집행을 하면서 15년간 일하다보니 저절로 어카운트의 귀재가 되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98년 연세대 경제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일년간 다녔다.
1999년 미국에 온 것은 이미 뉴욕으로 이민간 형, 시애틀에 사는 누나가 있었고 내심 ‘15년 회계 경력이 있는데..’ 하는 마음이 있어 이민을 결심했다.
처음 맨하탄 델리가게 매니저로 일주일동안 일하니 주급이 350달러, 두 달후 딜리버리, 세일즈를 하다가 얼마 후 도매상의 딜리버리 차량 운전수도 했다. 텍사스, 달라스, 시카고 등 미 남부와 중부 지역을 오가며 장거리 운전을 하다 보니 한번 출장가면 10일만에 집에 돌아왔다. 아내와 한 살, 세 살짜리 아이들을 두고 장거리 출장을 다니는 일이 힘들어 얼마 후 다시 맨하탄 델리가게에서 딜리버리를 하다가 달걀과 물 세일즈도 했다. 이렇게 이민 2년이 지났다.
“투잡을 뛰어도 주급을 받아서는 생활비 해결이 되지 않았다. 내가 돈을 벌고 아내는 아이들을 잘 키우기로 역할 분담을 했는데 도저히 먹고살 수가 없었다. 그때 누가 한주에 1,000달러만 준다고 했으면 계속 그 일을 열심히 했을 것이다. 내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2001년 2월이었다. 당시 맨하탄 지역에 델리가 1,700~1,800개가 있었다. 중국 등지에서 수입해 온 가비지 백과 일회용 컵과 용기, 포장재 사용량은 엄청 났다. 그때 뉴욕에서 건축 일을 하던 형에게서 얻은 밴 한 대와 용돈으로 받은 1,000달러가 있었을 뿐, 신범조는 숫기가 없다보니 친구가 많지도 않았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성당에서 만난 친구가 자신도 돈이 없으면서 카드 론을 하여 8,000달러를 빌려주었다. 목돈으로 빌렸으나 사업을 해가면서 갚자니 1,000달러씩 푼돈으로 갚았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그 친구와는 지금도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사업이 커가려면 투자금이 계속 들어가야 한다. 크레딧이 쌓이면서 2년후 은행으로부터 10만달러부터 시작하여 50만달러 융자를 받으면서 점차 사업도 확장되어 갔다. 탄탄한 기반을 닦은 지금도 그는 여전히 럭키 서플라이의 회계 업무는 직접 하고 있다.
▲부지런함이 생명
“원래 사업가 체질이 아니다. 비즈니스를 하려면 가게 주인과 친분이 필요한데 말도 잘 못하고 세일즈맨이 갖춰야 할 사교성도 없다. 다행히 취급하는 물건이 필수품이다 보니 별도로 광고나 세일즈가 필요 없었고 운도 좋았다. 물건이 떨어졌다면 밤에도 달려가 갖다 주고 가격도 좀 싸고 하니 저절로 입소문이 나더라.”
16~17년전 5,000~1만 스퀘어 피트 면적의 창고를 지니고 이같은 홀세일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가 400개 정도였고 다들 가격이 비슷비슷했다. “가격이 오르면 올라가고 내리면 다른 곳에서는 그대로 팔아도 우리는 내려서 팔았다. 그러니까 손님들이 믿고 찾아왔고 자기들끼리 럭키 서플라이를 소개해 줬다. 현재 고객의 30%가 한인, 70%가 외국인이다.”
24시간 하는 맨하탄의 델리에 새벽2시에도 딜리버리 가는 그를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초창기 시절 밤12시부터 4시까지 4시간 자고 종일 일하는 것이 7일내내 계속 되다보니 지금도 습관이 되어 새벽 4시반이면 일어난다. 강한 정신력과 부지런함은 직원들에게도 파급되어 어떤 폭설, 폭우에도 직원들은 새벽에 회사에 온다.
7~8년전부터 함께 일하는 형이 새벽 5시반에 회사 문을 열고 주말에는 두사람이 격주로 일을 한다. 회사를 방문한 이는 그가 지게차를 직접 운전하여 물건을 나르는 모습이 익숙하다고 전한다.
“회사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보람 있고 기뻤지만 늘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만 두고 싶을 때가 많고 힘들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늘 느낀다. 비즈니스의 기초를 닦는데도 사람이 가장 중요했다. 오전5시반부터 오후6시까지 전직원이 열심히 일을 하다보니 직원들이 돈을 벌어줬다. ”는데 30여명의 직원들은 대부분 10년이상 장기 근속자이다.
신범조는 2013~14년 2년간 미동부지역 단국대학교 동문회장을 하면서 친목에 앞장서 선후배로부터 신임과 존경을 얻었다.
▲‘ 사람이 기본’
신범조는 95년 결혼, 복선이씨와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은 현재 맨하탄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있다. 워낙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스스로 하고싶은 일을 찾아 다행이다. 작은아들은 노스이스턴 대학생인데 둘다 방학이 되면 회사 일을 돕기도 한다. ”
건강유지를 위해 테니스를 한지 10년이 넘었고 여가에는 골프를 즐긴다는 그는 무역업을 구상 중이며 지난 봄, 한국 인터내셔널 푸드쇼에 참여하여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신범조의 무기는 ‘근면과 성실’이다. 어떤 비즈니스를 새로 시작하더라도 가장 기본은 ‘사람’인 것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 자신 ‘사람이 진국이다’는 말을 듣고 있는 지도 모른다.
<
민병임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