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은 한국사회의 일그러진 얼굴을 대표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갑질에 관한 뉴스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온다. 대중들은 분노하고 그때마다 ‘갑질러’들은 고개 숙여 사과하지만 갑질이 수그러들거나 근절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갑질은 우월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힘과 지위를 사용하여 착취하고 괴롭히는 행위를 말한다. 이 단어가 등장한 것은 요즘이지만 이런 행태가 최근의 현상이 아님은 물론이다. 다만 인터넷과 소셜네트웍, 그리고 스마트폰 보편화로 갑질 행위 채증과 고발이 쉬워지고 여론형성 속도가 빨라지면서 그런 사례들이 더 많이 드러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갑질이 일상적 현상이 되면서 이제는 외국 언론들까지 관심을 보일 정도다. 외국 언론들은 이 단어를 애써 번역하기보다 아예 소리 나는 대로 ‘gapjil’이라 표기하고 뜻을 풀이해 준다. 지난 몇 년 사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갑질 사건만도 여럿 있었다.
그러더니 지난주에는 한국의 유명 제약회사 회장님이 상습적으로 운전기사들에게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내용의 폭언을 일삼아 온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론이 또 한 차례 들끓고 있다. 회장님이 말단 운전기사들에게 보인 언행은 단순히 갑과 을이라는 외형적 관계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양자 간의 지위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최근 불거졌던 별 둘 육군 사단장에 의한 당번병 폭행사건도 마찬가지다.
우월적 계급, 우월적 지위에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갑질을 하지는 않는다. 갑질과는 거리가 먼 따스한 인성과 리더십으로 존경받는 갑들도 우리 주위에는 많다. 물론 갑질은 지위나 관계에서 우위에 놓인 사람들이 저지르는 행위다. 하지만 그런 지위는 갑질의 전제조건일 뿐이다. 갑질의 보다 더 근원적인 바탕은 갑의 취약한 정신세계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본다면 힘은 쥐고 있는데 자존감은 약한 사람들이 갑질러가 되기 쉽다.
일본 철학자가 쓴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을 통해 선풍을 일으켰던 심리학자 아들러는 열등감을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에너지”라고 봤다. 이것을 잘 이겨낼 때 우리는 건강한 우월감을 가진 존재로 자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권력이나 지위를 갖게 될 경우, 존재에 대한 불안감은 종종 타자를 향한 비뚤어진 행태로 표출된다. 이것이 갑질이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회장님의 약력을 살펴보니 유수 사학에서 신문방송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경영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회장님이 언제 어떻게 공부를 했길래 나이 50이 넘어 그 어려운 박사학위를 딸 수 있었던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녹취록에 드러난 표현의 수준을 보면 박사님의 그것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회장님으로부터 지속적인 욕설과 폭언을 들었던 운전기사들은 한결같이 진심어린 사과를 원한다고 밝혔다. 이들이 받았을 정신적 고통과 충격을 생각하면 사과는 너무 소박한 요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뇌 영상 촬영을 통해 밝혀진 재미있는 사실은 갑질러가 진정으로 뉘우치는 모습을 보일 때 피해자의 뇌는 가장 큰 만족감을 보인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를 “복수의 진정한 의미가 ‘무너진 형평성의 회복’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니 갑질을 한 회장님은 운전기사들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 그래야 무너진 형평성이 회복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회장님은 400자짜리 짧은 사과문을 읽었지만 별로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여론이다. 제대로 된 사과와 함께 심리상담을 통한 치료도 권하고 싶다.
사람의 수준과 품격을 드러내는 것은 높은 지위나 학위가 아니라, 자신보다 낮고 약한 존재를 대하는 태도이다. 갑질은 품격과는 동떨어진 못난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이슈가 되는 갑질과,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사소한 갑질들이 ‘못난 행위’라는 본질에서는 똑같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되겠다.
<
조윤성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