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6일(음력 6월 15일)은 유두절이었다. 지금은 잊혀진 우리 전통명절인 유두절을 내가 기억하는 이유는 그 다음날이 ‘홍구 서현원’ 선생님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25년 전 내가 처음 국악을 입문하게 된 ‘현음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현원 선생님의 15주년 추모 행사에서 추모 연주를 하는데 가야금 파트를 해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의 전화였다. 악기를 손 놓은 지가 언제인데, 사정이 생겨 폭염이 한창일 때 한국을 방문한 내가 더워를 먹었는지 덜컥 승낙을 했다. 그러고는 걱정과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때가 아니다. 사부님께 다급히 전화하여 사정을 이야기하고 급속 레슨을 받고 손가락에 다시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나고 굳은살이 만들어지도록 연습을 했다. 힘들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뭔가가 날 신나게 했다.
추모 행사 당일도 나는 일찌감치 현음회관을 찾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뒤로 하고 가야금 연습에 몰두했다. 얼마만에 서는 무대인가! 혼자 설레하고 긴장하며 연습하는 사이 연주자들이 삼삼오오 모이고 우리는 함께 합주를 했다. 최종 리허설을 마치고, 추모행사가 열리는 대연학당으로 갔다.식순은 선생님의 일대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추모사, 추모시 낭독 등등 우리 순서는 일곱번째였다.
나는 그저 서현원 선생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기부를 많이 하셨고 그 일환으로 내가 속해 있는 순수 국악동호인단체 모임인 ‘현음회 의 둥지도 그분께 기증받은 것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식이 진행이 될수록 그분은 실로 존경스럽고 본받아 마땅하며 감사한 분임을 깨달았다.
선생님은 늘 검소하셨고 배움에 뜻이 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을 뒤에서 말없이 후원하셨다. 선생님 자제분은 어릴 적 집안에 도서관과 기숙사를 지어서 학자들이 기거하며 공부했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어린시절을 회상하셨다.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도 자가용을 사지 않으셨던 선생님은 택시를 타기도 만무했다. 늘 버스를 타고 다니시며 근검 절약을 몸소 실천하셨다고 한다. 홍구 선생님 덕분에 인간문화재이신 일관 선생님께서 영제시조를 보급하시고 지금까지 그 맥을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난 그저 내 생각만 하고 오랜만에 연주를 하는 것에만 들떠 행사의 의미는 뒷전이었던 것이 마냥 부끄러웠다. 순서가 되었을 때 진심으로 그분의 뜻을 생각하며 한 줄 한 줄 뜯을 때마다 감사한 마음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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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경(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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