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비즈니스를 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정치를 한다. 적은 지분을 최대한 활용해 판을 좌지우지하면서 실익을 챙겨간다. 레버리지, 즉 지렛대 활용에 대단히 능하다는 말이다. 트럼프 왕국 건설을 가능케 했던 그의 이런 비즈니스 방식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그의 레버리지는 유권자의 20% 내외로 추산되는 콘크리트 지지층이다. 트럼프는 이들의 표심을 미끼로 공화당 정치인들을 조종해왔다. 트럼프에게 찍힐 경우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우려해 마지못해 그를 지지하거나 침묵한 공화당 의원들이 적지 않았다.
트럼프가 앨라배마 연방상원 보궐선거에서 성추문 의혹이 제기된 로이 모어를 공개 지지한 것도 이런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흠결투성이 후보라도 자기가 밀면 당선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공화당내 영향력을 한층 더 공고히 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계산은 빗나갔다. 의외의 결과였다.
대표적 진보매체인 뉴욕타임스는 보선결과와 관련, ‘Roy Moore Loses, Sanity Reigns’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품위와 상식의 승리”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큰 타격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설이 말하고자 한 모든 것은 ‘새너티’(Sanity)라는 한 단어 속에 응축돼 있다. ‘새너티’는 정신이 온전하다는, 즉 제정신이라는 뜻이다. “정치가 제정신을 차린 것 같다”는 희망적 해석을 담은 제목으로 보인다.
사실 정치적 양극화는 정치가 점차 제정신을 상실하면서 시작되고 심화돼 온 현상이다. 후보들은 정책경쟁을 벌이고, 유권자들은 냉정한 잣대로 누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할 후보인가를 판단해 표를 던질 때 좋은 정치가 가능해 진다. 이것이 제정신을 가진 정치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정치는 이런 당위론과는 반대방향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여 왔다. 정치가 진영 간 이념대립의 싸움터로 변질되면서 이성과 상식은 실종되고 반대를 위한 반대, 그리고 무분별한 편견과 증오 같은 원초적 감정만이 난무해왔다.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치세력은 깃발만 꽂아도 무조건 당선 된다”는 그동안의 경험칙과 믿음은 이런 후진적이고도 퇴행적인 정치수준을 시인하는 부끄러운 고백에 다름 아니다.
모든 분야가 눈부신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이런 추세에 역행해 온 유일한 분야가 정치다. 1960년대만 해도 정치가 이 정도로 수준이 낮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 남부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당선되는 일은 별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흔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반역적 정치인들이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전까지는 박정희가 호남에서 더 많은 표를 받고 영남에서 진보적 성향 야당 정치인들이 당선돼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 정치는 그래도 제정신이었던 것이다.
이후 정치판이 어떻게 온전한 정신을 버리고 밑바닥으로 추락해 왔는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SNS와 가짜 뉴스들까지 더해지면서 추락은 한층 더 가속화됐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선동을 일삼아 온 정치인들과 이에 휘둘린 유권자들 모두에게 똑같은 크기의 책임이 있다.
이렇듯 절망적이었던 상황에서 앨라배마 보선의 예상 밖 결과는 정치가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갖게 한다. 지난 해 한국 총선에서 보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대구에서 31년 만에 처음으로 정통 야당후보가 당선됐을 때도 비슷한 기대감이 고개를 들었다.
물론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당장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비 한 마리가 기나 긴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는 희망의 징후일수도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내년은 이런 희망이 얼마나 근거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한 해가 될 것이다. 미국에서는 11월 중간선거가 있고 한국에서는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정치권을 제정신 들게 하려면 유권자들부터 정신 차리고 이성적인 메시지를 분명하게 던져야만 한다. 조금이나마 제정신이 돌아온 정치를 이제부터라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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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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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보고 싶습니다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