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저곳 기웃거리며 타지를 떠돌다 돌아오니 집 앞 길이 낙엽으로 온통노랗게 물들었다. 화단에 물을 듬뿍 주고 거실에 느긋하게 앉아 음악을 듣는다. 어느새 어둠이 창가로 밀려들고 더할수 없는 안온함으로 가슴이 가득 차오른다.여기저기 떠돌다 집에 돌아오면 매번 가지는 느낌이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어질러져 있지만 익숙한 탁자며 오래돼 헤진 의자며 먼지 뽀얀 책장, 여기 저기 낙엽 뒹구는 마당, 언제나 거기 서있는 나무들과 빈 벤치들, 참 정겨운 것들이다.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늘 어디론가 떠나고자 하지만 그것은 아마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레임이 주는 행복감과 안온함이 주는 행복감, 두가지를 골고루 누릴 수 있다는 건 분명 엄청난 행운이다.
사실 온전히 집이 집으로 여겨진 것은 그리 얼마되지 않은 듯싶다. 일터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시부모님이 계신 집이라는 공간은 또 하나의 일터였다고나 할까. 30여년을 그저 하나의 일터에서 또 하나의 일터로 오가며 산 셈인데 가게는 생계를 위한 일터요, 집은 내 의무수행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한 일터였다 할수 있겠다. ‘성실히’라는 말을 쓰기에는 사실 좀 부끄럽기는 하다.
집을 집으로 여기지 않은 나의 태도는 유연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경직된 것이어서 때로 부러지는 아픔과 고통이 뒤 따르기도 했는데 결혼과 동시에 덤으로 얻은 새 가족이라는 이름과 그 안에서의 부대낌은 당시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추구하고 누리던 나의 자유, 그리고 예술의 길을 처참하게 무너뜨릴 만큼의 위력을 가진 것이었다.
그 무너진 길 앞에서 후회와 탄식 대신 선택에의 책임을 지려했던 또 하나의 선택으로 나는 그 자리에 엎어진 채 미동도 없이 오랜 세월 그저 있었다. 내 존재의 숨소리를 그 누구라도 알아챌까 두려워 모든 문들을 닫아 걸어 잠그고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그 위로 꽃잎들은 바람처럼 흩어지고, 비가 내리고, 낙엽은 흩날려 등허리를 수없이 쓸고 사라졌다. 그리고 차가운 눈이 오래 오래 내렸다. 그 세월 동안 사방의 문은 녹슬어버렸고 바위가 되어버린 나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나는 나가는 문을 두드리는 대신 내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초저녁인데도 한밤중같은 어둠을 밀고 커다란 몸집의 소방차와 소방서 소속 앰뷸런스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더니 우리집 맞은편 앞에 멎는다. 무슨일일까, 심장이 뛴다. 시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오버랩되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창 밖을 주시한다.
86년의 긴 시간들을 검은 비닐 주머니 하나에 담고 시어머니는 집을 떠나셨다. 5년여 전의 일이다. 너무나 가볍게, 아무 것도 아닌 일처럼 사람은 간다. 산 세월의 무게에 비하면 턱도없이 간단명료해서 슬프고, 그 세월 겪었을 수많은 격동의 시간들에 비하면 너무나 별일이 아닌듯하여 서러운, 그런 모습 남기고 가신 이 집… . 내게 이 집은, 아니 정확히 말해 이 집에 묻힌 시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가끔 꺼내어 애틋한 심정으로 되씹어보는 추억이라기보다는 원하든 원치않든 시시때때로 내 일상에 늘 함께하는 각인같은 것이다. 그 각인의 흔적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물들과 어느불특정한 순간들, 그리고 모든 공간에 배어있어 아직도 나는 가끔 아리고 아프다.
무너진 길 앞에서 너무 오랫동안 엎어져 있던 탓에 나는 무릎을 펴는 방법을 잊어버렸고 겨우 일어났지만 걸음은 마냥 서툴어 느리고 휘청인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하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안온함, 집을 집이라 여길수 있는 이 행복감, 그 어떤 각인을 평생 새긴채라도 이만하면 내 운명에 감사하지 않을수 있으랴.
골목 안 소방차는 떠나고 앰블런스 들것에 할머니 한 분 누워있다. 곧 이어 앰블런스마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할머니를 싣고 휑하니 가버렸다. 저 길이 집을 떠나는 마지막 길이 될 것이란걸 저 할머니는 알고 있을까. 그리고 어느 다른 곳 묘소에 육신이 묻히더라도 남은 이들에겐 저 집이 할머니의 진정한 묘소가 되리라는걸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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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자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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