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 성노예 피해 증언 첫 유럽 여성 오헤른 회고록
▶ “용감한 한국 여성들 보며 50년만에 침묵 깼다”
1942년 3월 일본군이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 자바를 침공했을 때 얀 루프-오헤른은 19살이었다. 암바라바 포로수용소에 감금된 오헤른은 2년 뒤 스마랑으로 이동, 일본군으로부터 성 학대를 받았다.
유럽인 중에서는 처음으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라는 사실을 증언한 오헤른 회고록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가 국내에 소개됐다. 저자는 '50년 동안의 침묵'이 원제인 회고록에서 1992년 TV를 통해 일본군 성노예 한국인 피해자들을 보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내 안에, 나는 저 여성들과 함께해야 하고 저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강력한 감정을 품게 됐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 온 이야기를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여성들의 용감한 행동을 보며 나도 용기가 생겼다. 오랜 주저 끝에 마침내 말할 수 있게 됐다."
오헤른은 꿈많은 대학생이 어떻게 일순간에 다른 삶을 살게 됐는지를 시간 순서대로 들려준다. '칠해정'으로 불리던 스마랑 지옥에 갇힌 여성들은 몸도 영혼도 병들었다. 저자는 무자비한 성폭력 앞에서 부서진 마음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신앙심, 같은 처지 소녀들과의 연대,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그나마 그를 지탱하게 했다.
오헤른이 이후 50년간 꽃이라면 진저리쳤던 사연도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는 생일이나 어머니날에도 가족에게 절대로 꽃을 갖고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스마랑에서 꽃에서 딴 이름으로 불렸고 방에도 꽃들이 놓인 기억 때문이다.
오헤른과 여성들은 분명 전쟁 피해자였음에도 종전 이후에 따뜻한 격려를 받지 못했다. 본인도 일본군 포로였으나 오헤른 고백을 들은 뒤 "네가 수녀가 되지 않는 게 낫다"고 말한 사제 모습은 오랫동안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사람으로 바라본 한국 사회와 겹쳐 보인다.
호주 남부 도시에 사는 95살 오헤른은 지금도 전쟁 성노예 피해 문제에 활발히 목소리를 낸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뻔지르르한 표현"이라면서 분명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 학대받은 가련한 여성들을 일본인이 어떻게 감히 '위안부'라고 불렀는지를 생각했다. 우리는 '위안부'였던 적이 없다. 우리는 '전쟁 강간 피해자'들이다."
삼천리. 최재인 옮김. 308쪽. 1만7천 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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