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잠시 머물고 있는 워싱턴 주에도 겨울이 오고 있다. 거리마다 하늘로 솟은 키 큰 나무들은 붉고, 노오란 잎들을 가득 매달고 있다가 지금은 다 떨구는 중이다.
아침 일찍 거리로 나서면 목이 움츠려지는 추위, 그런 찬 기운은 내 집이 있는 캘리포니아에선 느끼기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찬바람 속에 길을 걷는 일이 조금은 상쾌하기도 하다. 여행지의 낯섦, 또 그만큼 낯선 차가운 공기가 마치 나를 새롭게 하는 것만 같다.
여기 머무는 동안 나의 정기적인 외출은 아침 미사에 가는 것이다. 지난 10월 방문 때엔 붉은 단풍이 가득하던 나무가 어느새 헐벗은 채 성당 마당에 서 있다. 빈가지만 하늘로 뻗친 나무를 올려다보며 한 달여 동안에도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에 새삼 시간의 역동성을 생각해본다. 마치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 자연의 인테리어를 바꾸어놓은 것만 같다.
미사를 마치고 한 잔의 커피를 찾는다. 이 싸늘한 기운 속에 따뜻한 커피만큼 어울리는 것이 또 있으랴. 모닝커피 몇 모금에 오소소했던 몸이 덥혀지자 가슴속에서 얼굴을 내미는 한 사람이 있다. 새벽녘에 집을 나서면 늘 고향의 나지막한 산 활터에서 활을 쏘시던 아버지. 적당히 활시위를 당기다가 등에 땀이 배어들 무렵이면 아버지는 산을 내려와 동네 다방에 들렀다. 더러 지인들이 차를 마시고 있는 그곳에서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홀로 커피를 즐기셨단다.
잎이 떨어져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해본다. 혹 오래전 아버지의 아침 활터와 지금 나의 아침 미사가 비슷한 건 아닐까. 집중과 명상이라는 점에선 말이다. 평생 넉넉한 성품에도 무종교이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아침마다 당신의 정신을 단련했던 건 아닌지. 그리고서 마셨던 한 잔의 커피, 그것은 아버지 나름의 멋이고 행복이었다. 내가 지금 모닝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얼마 전 ‘아버지’란 제목의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나서 자꾸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 소설을 쓸 때는 기억을 통해 새 인물을 창조하느라 정말 아버지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완성된 소설을 반복해 읽어볼수록 그 속엔 내가 모르던 아버지가 있었다. 마치 나는 결코 알 수 없던 것을 문학의 정령이 알려준 듯 내 문장 속에 아버지의 외로움이 보였다.
어느새 다 마신 빈 커피 컵을 내려놓고 핸드폰의 웹을 여니 아는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꼭 10년 전 고국의 작가 창작실에 같이 머물렀던 젊은 여류작가의 칼럼이다.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굽이 높은 긴 부츠를 신고 창작실 주변 길을 또각또각 걷던 그녀.
그때도 이렇게 싸늘한 가을의 끝이었고,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타려던 그녀는 산책에서 돌아오던 나와 마주쳤다. 젊고 촉망받는 작가였지만 그녀는 때로 내 방에 들러 자신의 작가적 미래를 걱정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갈 길이 먼 젊음이기에 나이 먹은 나보다 더 애가 타는지도 몰랐다.
그 창작촌에 겨울이 왔을 때 우리는 몇몇 작가들과 밤을 지새우는 거나한 송별파티 끝에 헤어졌다. 그 얼마 후 그녀가 큰 문학상을 받게 된 기사를 읽고, 나는 미국 땅 멀리서나마 박수를 쳐주었다. 하지만 곧 그녀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반신이 마비돼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고. 위로의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깊은 아픔에 진정한 위로를 건네는 것엔, 이만큼의 생을 살고도 나는 아직 서투르기만 하다. 때론 침묵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그저 믿고 싶었다.
빈 커피 컵을 내려다보며 앉았는데, 늦가을의 시골길을 걷던 그녀의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 찬바람과 이맘때면 스산했던 풍경과 함께.
새삼 이 여행지의 찬 기운이 사실은 익숙하다는 걸 깨닫는다. 태어나고 성장하며 몸에 새겨졌던 고국의 찬바람이 내 피부 곳곳에서 불어나온다. 오랜 세월 전의 아버지와 10년 전 건강했던 젊은 동료를 떠올리면서. 아련하고도 싸한 바람이 창밖과 가슴에서 함께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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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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