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재현 전 미국방군수청 안전감사관
오래 전 일이다. 잠결에 어렴풋이 들렸다. “미스터 윤에게 베개를 가져다주시오.”
파견대장 스미스 대령의 목소리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깼다. 모 방위산업 회사의 현장관리 파견대의 월요일 아침 참모회의였다. 긴 테이블 윗자리에 파견대장이 앉고 그 옆으로 부관, 기획, 품질관리, 회계, 생산 그리고 기타 참모와 맨 끝에 안전관리 담당인 내가 앉았었다. 모든 사람의 눈이 나에게 쏠렸다.
전날 밤에 잠을 잘 잤는데, 왜 그렇게 졸렸을까. 밥을 먹기만 하면 졸린다. 식곤증인가. 갱년기 장애인가.
참모회의에서 내가 졸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두셋이 모이면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다. 나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몇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내가 독방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배가 아팠다고 생각한다. 나의 자격지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아내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다가 일을 저질렀다. 파견대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의 육해공군 기지에 안전관리직 공석을 찾기 시작했다. 웬걸, 시애틀이나 샌디에고 같은 노른자위는 벌써 그곳 터줏대감들이 차지하고, 한 자리 공석이 있는 곳이 아무도 가지 않는 샌프란시스코였다. 주거비 비싸고 교통이 불편해서 공석으로 있은지 오래다. 그곳 파견대 인사담당에게 전화했더니 내일이라도 오라고 한다.
퇴근 후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참모회의에서 깜빡 잠들었다가 나에게 베개를 가져다주라는 파견대장의 핀잔을 듣고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아내는 기가 막힌 모양이다.
“나의 체면이 있지. 한국 사람은 체면에 죽고 살잖아요.”
“그렇다고 사직서를 내면 어떻게 해요. 자리 먼저 구하고 사직서를 내야지.”
아내의 말이 옳았다. 나는 항상 일을 저질러 놓고 후회한다. 범위를 넓혀서 네바다와 애리조나까지 일아 보았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막내딸에게 샌프란시스코 근교로 이사 가면 어떨까 물어보았다.
“절대 안돼요, 떠날 수 없어요, 친구들이 있는 이곳을.“
나는 혼자 그곳으로 가서 방을 얻고 일하며 주말이나 시간이 되면 집에 내려올까 생각해보았다.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이다. 연금이 줄어드니까 조기은퇴를 할 수도 없고.
아내는 “호들갑 떨지 말고 일단 파견대장이 사직서를 수락하는가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 다음에 갈 곳을 알아보면 되지요. 그 동안 당신이 얼마나 일을 잘했는지 심판의 날이 왔네요.” 아내의 말이 옳다.
나는 기도드렸다. “하나님, 직장에서 위기를 맞았습니다. 저를 구출하여 주십시오.” 지옥 같은 한 주가 지나갔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니 책상 위에 흰 봉투가 놓여 있다. 뜯어보니 파견대장의 메모였다.
“미스터 윤, 책임감을 느끼고 사직서를 제출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직서를 반려하니 앞으로 충실하게 근무해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파견대장 사무실로 달려가서 “감사합니다” 하며 큰절을 드리고 싶었다.
참모회의에서 파견대장과 모든 참모가 보는 앞에서 나는 졸았다. 미국사람 같으면 “아이 앰 소리”로 끝났을지 모른다. 나는 사직서를 제출하여 위기를 만들었다. 며칠 동안 팥죽 끓듯 고심하다가 해방되었다.
그놈의 체면이 무엇인지. 미국에 40여 년을 살았어도 사고방식은 아직 한국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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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현 전 미국방군수청 안전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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