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는 본래 우리 땅이다. 왜인들이 들어와 흉악무도한 짓을 저질러 장수들에 명해 섬을 휩쓸어 항복하기를 기다렸지만 아직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항복하면 우리 백성과 같이 사랑할 것이나 다시 도적질할 마음을 품는다면 군사를 보내 응징할 것이다.”
조선군이 대마도 정벌에서 돌아온 직후인 1419년 7월 세종이 대마도 도주에게 보낸 회유문의 한 대목이다. 세종 즉위 이듬해인 1419년 5월 충청도 등지에 왜구가 침입해 조선 병선을 불태우고 미곡을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세종은 상왕 태종의 뜻에 따라 대마도 정벌 명령을 내린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세종은 대마도 정벌에 소극적이었지만 완강했던 태종의 대마도 응징 의지를 꺾지 못했다.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명하고 출병을 지시한 세종은 태종과 함께 한강 두모포에 거둥해 연회를 베풀며 출정식을 갖는다. 병선 200여척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에 나선 이종무는 왜인 선박 100여척을 소각하고 중국인 포로 100여명을 구출하는 성과를 거둔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태풍 우려가 커지자 조정은 출정군의 철수를 결정하지만 왜구가 다시 준동할 기미를 보이자 세종은 대군을 보내겠다는 강력한 경고문으로 이를 제압한다.
두모포는 서울 옥수동의 옛 이름으로 중랑천과 한강 본류가 만나는 지점이다. 각지에서 농산물과 목재 등을 들여오는 나루터였는데 두뭇개 등으로 불리던 것이 한자음을 따와 두모포라는 명칭이 생겼다. 올해 600주년을 맞은 두모포 출정 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 행사가 지난 8일부터 오는 30일까지 옥수역 한강공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조선이 당시 대마도를 정벌한 배경에는 명나라를 염두에 둔 외교·안보적 고려도 작용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왜구 때문에 고민하던 명이 일본 정벌을 고려하고 있다는 풍문에 조선이 한발 앞서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는 것이다.
자칫 명군이 일본 정벌을 감행하면서 조선에 길잡이 역할을 압박하거나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적극적인 안보 전략이라는 의미다. 강대국 명나라와 이웃한 조선은 개국 초 지정학적 위기 요인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군사·외교 책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 낀 오늘날 우리 외교 안보 현실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남기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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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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