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인가, 고등학생이던 큰 딸이 기운이 없고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하여 약을 좀 지으러 갔더니 한의사가 산책을 권유했다.
“일단 약도 먹여보시고, 워낙 활동량이 적어서 그럴 수도 있으니 식사 후에 한 시간 정도 산책하시면 좋아요.”
그래서 당장 그날부터 동네 한 바퀴 돌기를 시작했다. 딸을 위해 시작한 거였는데, 정작 딸은 너덧 번 동행하더니 숙제가 있다, 피곤하다는 등의 이유로 점차 빠지고, 나와 남편만 꾸준히 걷게 되었다.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초기 목적이 상실된 그 산책을 계속 유지하게 된 건 우리 부부가 그 시간의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녁 먹고 아직 어둑해지기 전, 한낮의 햇빛이 식어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시간, 집을 나서서 익숙한 주택가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기며 서로 그날의 직장 일, 아이들 이야기, 문득 드는 생각들을 나누다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정신적 신체적으로 기분 좋은 상태가 되곤 했다.
걷다 보면 평소 예사로 지나치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고, 차로 다닐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길가에 피어난 들꽃들, 초록빛이지만 조금씩 다른 나뭇잎의 명암, 각양각색의 창문, 현관 앞에 놓인 흔들의자, 가끔 고양이도 만나고, 늘 보던 하늘과 구름도 다시 보인다. 어느 집 뒷마당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나기도 하고, 다른 집 부엌 창 너머로는 설거지하는 그림자가 그릇 달그락 소리와 함께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으면 같이 음식을 나누라는 말이 있다.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친밀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좋지만, 나는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으면 그 사람과 같이 산책을 하라고 하고 싶다.
한 주에 적어도 두세 번은 동네를 돌던 그 계절을 지나면서 나와 남편의 사이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가정의 대단한 중대사를 심도있게 논의한 건 아니다. 뭔가 결정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꼭 해야 되는 목적 있는 대화보다는, 그냥 그날그날의 스쳐가는 감정들, 해도 되고 안 해도 지장 없는 별 것 아닌 이야기들, 하지만 말하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풀리는 말들. 평화로운 주변의 일상 속을 천천히 거닐며 그런 소소한 대화를 하고 충실히 들어주는 시간을 통해 서로를 더 이해하고 신뢰하는 시간을 쌓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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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하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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