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산업 ‘경제 독립’ 불가능한데 정치논리·감정에 국가전략 휘둘려
▶ 협업 기반 글로벌 밸류체인 인정...내실화·초일류기업 육성 나서야
밝은 햇살과 달리 강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학술교류 차원에서 어느 일본 국립대에서 계절수업으로 ‘한국경제론’을 강의한 지 십여 년이 흘렀다. 과거 어느 때보다 한일관계가 악화된 지금 일본 대학생들에게 한일 경제관계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한국경제에 관심이 있을지, 수강생은 줄지나 않았는지 등으로 머리가 무겁기만 했다.
지난 십여 년간 대일 무역적자는 매년 200억달러 정도나 되고 그 대부분은 부품·소재·장비 품목이 차지하고 있다. 일본과의 교역비중이 줄어드는 가운데 산업 내 무역 및 수직적 분업구조는 심화됐지만 글로벌 공급체인에서 뛰어난 분업 효과를 누리는 파트너가 돼 시너지를 누렸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영향은 우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무역전쟁이 불가피하게 됐다.
역사·정치 및 안보 등의 현안을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무역전쟁으로까지 확대한 일본의 조치에 대해 국민 여론은 들끓었고 불매운동,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연장종료 등으로 맞불을 놓았다. 책임 있는 당국자는 ‘죽창가’를 언급하며 반일 전선에 앞장서기도 했다.
전쟁을 한다면 이겨야 한다. 무역전쟁이나 경제전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책임자는 감정적 호소에 앞장설 것이 아니라 전쟁을 왜 해야 하는지, 승산은 있는지,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냉정하고 차분한 전략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20세기 이후 우리는 경제 및 무역 분야에서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 조선·석유화학·자동차·철강은 물론 우리나라를 ‘반도체 코리아’로 우뚝 세우고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키웠다. 글로벌 경쟁에서 위축되기만 했던 우리로서는 엄청난 쾌거였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강의실로 향하면서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지난해보다 오히려 수십명이 늘어난 170여명의 수강생이 강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내 머릿속은 오히려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필수과목이 아니니까 안 들으면 그뿐인데….’
악화하는 한일관계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를 공부해 보겠다는 진지한 자세는 일본 특유의 저력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한국경제의 발전과정, 한일 경제관계 강의에 열중하는 일본 대학생들의 자세는 언제나처럼 진지하기만 했다. 양국 관계가 무척이나 나빠졌는데도 한국경제를 왜 배우고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눈에 띄지 않았다.
세미나 발표 및 토론 시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악화된 한일관계로 인한 얕은 ‘혐오’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전후 한국에서 중공업을 일으켜낸 비결, 강력한 경쟁국들을 제치고 첨단 산업에서 우위를 점한 ‘삼성’의 탄생과정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과 토론을 했다.
어쩌면 이번을 계기로 우리는 주요 산업 분야에서 ‘경제적 독립’을 이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독립을 이뤄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며 수출국으로서 거대한 글로벌 공급체인의 한 축에 해당하는 우리나라는 다른 국가와 협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 어느 국가도 자주권을 빼앗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21세기 ‘독립운동’은 국가적 산업 내실화 차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경제계와 국민들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남은 것은 단 하나뿐이다. 국정 책임자와 전략가들이 감정적 호소에 기대며 정치적 표심을 얻는 근시안적 사고가 아니라 승자 없는 이 전쟁을 보다 잘 마무리할 냉철한 출구전략 준비와 결단력이다.
21세기 ‘독립운동’은 죽창가를 부르며 하는 것이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반도체 산업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같이 세계 초일류기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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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모 대만·CTBC 비즈니스스쿨 석좌교수 한국경제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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