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온 지 2년 되는 한 친구가 요즘 커뮤니티 칼리지의 ESL 수업을 듣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이번 학기는 온라인으로 수강하는 모양인데, 화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대면 수업에 비해 몸도 마음도 편하다며, 앞으로도 온라인 수업 위주로 수강하고 싶다고 한다.
서른 넘어 첫 유학 경험이니 아무래도 조금 소심해지는 모양이다. 그 기분 매우 이해한다. 십여 년 전의 나도 비슷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바로 본 수업을 수강했던 점이 조금 다르다.
랭귀지 스쿨과 달리 본 수업은 이민자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학점 경쟁의 장이다. 서양 근대철학 수업이 제일 잔인했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교수가 못됐기 때문이었다. 덩치가 크고 턱수염이 수북한, 위압적인 인상의 젊은 백인 남자 교수였는데, 영어가 유창하지 못해 안 그래도 바보처럼 들리는 나의 발언 하나 하나를 더 멍청하게 들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한 이후에 요리를 시작했는데” 라는 말을 하면 “결혼이랑 요리가 무슨 상관이지? 여자라고 결혼하면 요리를 해야 해?” 하고 말허리를 잘라먹으며 쏘아붙이는 식이다.
지금의 나라면, “한국에서는 결혼 전의 젊은이가 부모와 생활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가사 노동을 전적으로 책임져본 경험이 없는 일이 드물지 않다. 당신이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지, 나의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남편과 나는 공정하게 가사 분담을 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요리를 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라고 야무지게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미국 땅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 살아보지 않은 주제에 이민자들에 대한 우월의식에 젖은 한심한 인간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그에게 고마운 점이 있다면, 나의 정신적 맷집과 깡을 길러준 것이다. 덕분에 나는 쌈닭이 되어 화가 나면 영어를 몹시 잘 하는 초능력이 생겼다. 그 교실에서 서른다섯 명이 보내는 경멸, 비웃음, 동정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에서 이민자로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요즘, 한층 그때의 경험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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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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