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캐스터의 한파 예고는 흥분된 목소리로 한껏 높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십년 만에 처음으로 북극 한파의 영하 날씨에 눈까지 온다고 하니 사십도를 오르내리는 여름과 일년 내내 영상의 날씨인 이곳 남부지역에서는 아주 심각한 천재지변이 되는 것이다. 연일 경고 메시지가 뜨고 마트에는 벌써 물과 비상용품이 바닥이 났다. 코로나로 일년이 넘는 오랜 시간 비상 사태에 지치고 무감각 해 있을 즈음이라 어찌 대처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미국 남부의 휴스턴으로 오게 되었을 때 작은 딸은 아주 어린 나이였다. 대학입학을 눈앞에 둔 지금의 나이가 되도록 눈으로 직접 눈 다운 눈이 내리는 겨울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늦은 밤부터 내려 온동네가 하얗게 쌓이는 눈을 마냥 신기 해하며 아무도 밟지 않은 눈에 발자국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 눈을 배경으로 제법 그럴싸한 겨울의 모습을 연출하며 서 있는 나무들이 가로등 빛을 받아 한밤의 운치를 더했다. 깊은 밤 아니 이른 새벽이 지나도록 신기하게 찾아온 하얀 세상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없는 작은 딸에게 어릴 적 내가 생각 나 빨리 들어오라는 재촉은 하지 않았다. 하얀 새벽 고요함 속 겨울 풍경이 고향 같아서 내일이면 얼어붙어 빙판길이 될 걱정을 잠시 잊어버렸다.
설마 했던 한파 예고는 빗나가지 않았다. 눈 덮인 깊은 밤 잠깐의 감상이 죄스러울 만큼 사건과 사고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곳 저곳의 빙판길 교통사고는 넓은 땅 덩어리 만 큼이나 대형으로 일어나 텍사스의 남과 북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에서는 백여대의 차들이 연쇄 충돌을 일으켰다. 지역별 전력 차단으로 전기가 끊겨 난방이 되지 않았다. 뉴스에서는 미국의 최대 에너지 생산과 발전량을 자랑하는 텍사스가 아무리 백 년에 한번 올 법한 한파라 고는 하지만 이리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는지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풍력, 천연가스, 석탄, 등 에너지 발전의 모든 부분에 높은 비용이 들어가는 내한 장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미국 최대의 에너지 자원을 가진 텍사스의 자만심이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의 규제와 관리를 거부 타 지역과의 전력연결망을 단절시켰기 때문이라 한다.
다행히도 가스 공급엔 차질이 없었기에 벽난로 주위에 둘러 앉아 밤을 보내는 가정들이 많았다. 이따금씩 울려 대는 사이렌 소리가 촛불로 인한 화재였음을 지역 뉴스가 보도했다. 예고된 일이었지만 극심한 일교차는 겨울이 매서운 고향을 경험한 나 조차도 당황스러웠다. 낮에는 그럭저럭 움직임 때문인지 견디어 낼 것 같았는데 밤은 생각보다 추었다. 항상 자동으로 맞춰진 적정 온도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평소에도 일상에서 벗어나는 조금의 추위와 더위를 참지 못했었다. 몇 안 되는 두꺼운 솜이불을 모두 꺼내어 놓았고 아이들에게 최대한 많은 옷을 입고 자게 했다. 문득 사거리에서 자주 보이는 노숙자는 갑자기 찾아온 이 혹한의 밤을 어찌 지낼까 하는 작은 아이의 걱정에 촛불 하나가 밝혀준 이 따스함이 너무 미안해졌다.
동파를 염려해 두껍게 수도관을 감싸고 조금 열어 두기까지 했건만 낮에는 졸졸 흐르다 밤이 되면 멈추기를 반복한다. 더군다나 수도국의 정화장치 동파로 식수 사용에도 문제가 생겼다. 가늘게 흐르는 수도물을 하루 종일 받아 겨우 욕조에 채웠다. 이틀정도 후에 다시 영상의 기온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예보에 뭐 그리 많은 물이 필요 할까 방심했다가 식구들이 하루 사용하는 물의 양에 놀라 허둥대며 큰 그릇마다 물을 채워 놓았다. 코로나로 인한 일상의 비상사태는 어느 정도 불편함을 참아 내는 인내력을 길러주었지만 나름 잘 견디어 모든 것이 곧 지나 가리라던 우리의 작은 바램이 수레바퀴 앞에 사마귀처럼 애처롭다.
최고의 폭풍 해일을 기록하며 텍사스 남부 갤버스톤 해안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 허리케인 ‘아이크’가 왔을 때는 낯선 이민 생활을 막 시작하려던 때였다. 하늘을 무너뜨릴 것만 같은 대륙의 천둥과 함께 밤과 낮을 뒤 바꾸는 듯한 번뜩이는 번개는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아직 어리기만 했던 아이들과 함께 밤을 꼬박 세웠었다.
허리케인 ‘하비’는 미국의 네번째 대 도시인 휴스턴에 기록적인 홍수를 발생시켰다. 평년보다 1도가 높아진 멕시코만의 해수온도로 늘어나는 수분을 흡수해 강력해진 태풍이 기이한 풍속을 만들어 장시간 많은 비가 내린 데다가 물이 잘 빠지지 않는 토질과 넓은 평지에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시 특성상 피해는 더욱 컸다. 처음으로 장만한 집 앞까지 물이 차서 올라와 한참동안이나 마음을 조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번 경우에는 북극의 찬 공기가 남하할 수 없도록 울타리를 만드는 제트기류가 온난화로 세력이 약해지면서 북극 한파의 위세가 이곳 남쪽 휴스턴까지 남하하는 것을 막지 못한 이유였다. 이제는 지구 촌 어느 곳에서도 기존의 날씨와 계절을 고집할 수 없다. 허리케인을 발생시키는 수 없는 대기의 소용돌이는 언제 어느때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미래 학자들은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가 코로나 보다 더 큰 재앙의 시작 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구의 기온이 1도씩 오르면 만년설이 사라져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고 식량이 부족 해 지며 사람이 살 수 없는 이유로 대 이동이 발생할 수 있다는 환경 전문가들의 이야기는 내 아이들이 살아갈 멀지 않은 미래의 일이 되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휴스턴에서 어느 날 갑자기 정해진 경로를 이탈해 방향을 잃어버린 혹한은 지난 여러 해를 걸쳐 배출된 탄소와 내가 버린 일회용 접시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버린 세제로 오염된 바다 때문 일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의 발전 속도와 그 한계는 앞으로 우리가 인지하고 예측할 수 없는 시점까지 올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때가 되면 천재지변조차 조절가능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것들에 적응해야 하는 수고는 이미 나에게는 버겁다. 그저 어느 날 문뜩 온 세상이 하얗게 내리는 눈이 그리울 때 산과 강이 어우러져 겨울의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운 나의 고향으로 가서 겨울의 눈 다운 눈을 두 팔 벌려 맞고 싶을 뿐이다.
당선소감 | 이시은
갑작스러운 남편의 췌장암 선고로 한국에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던 중에 당선 메일을 받았다. 평소 산과 바다를 좋아했던 남편은 암진단이 나오자 산과 강이 어우러진 고향으로 가자고 했다. 발아래로 펼쳐진 운무와 처녀 등반으로 나의 기억에서 지울 수 없던 아름다운 산 봉우리에 케이블카 정거장이 세워지고 달팽이를 잡으며 놀던 예쁜 강자락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놀이 시설을 만드느라 온통 파헤쳐 강산을 또 한 번 바꾸어 놓을 기세다. 수려한 산과 맑은 강물이 주제인 이 아담한 도시에 고층 아파트들이 어색한 만큼이나 지금의 나는 모든 것이 낯설다. 어제를 추억하는 여유보다 하늘 만이 알고 있는 내일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내 자리를 알지 못해 방황하던 중 기대하지 않았던 당선 소식이 가뭄 끝에 단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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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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