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쌓였다가 얼었다가 녹았다가 넘쳤다가 말랐다가 하던 검은 땅을 뚫고 나온 손톱만한 새 싹에서 따스한 햇빛 아래 화사하게 흐드러진 꽃밭이 눈에 보인다.
팬데믹 끝자락에 명실공히 봄이 찾아드는 가 보다.
오랜만에 인터넷으로 허드슨 밸리 지역 미술관들을 찾아보니, 그들도 어두운 굴 속에서 나와 기지개를 펴듯 새로운 전시 목록들을 나열하고 있다.
지난 10여년 웨체스터 지국일을 하면서 이 지역에서 열리는 좋은 전시들을 알리려고 자주 큰 뮤지엄이나 작은 갤러리 등을 찾아 다녔다.
집 가까이에 있는 곳에서 부터 한 두시간 정도 운전으로 갈 수 있는 숲 속 마을 어디엘 가도 개성있는 미술관들이 구석 구석 심겨져 있다.
세계 미술의 중심인 맨하탄과 달리 이곳 아트의 현장들은 언제나 한적하고 고요하지만 역시 첨단을 가는 예술과 역사를 담은 예술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맨하탄튼에 차를 타고 가면 파킹이 지옥이고, 기차를 타자면 시간과 드는 돈도 만만치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한 예술을 만나러, 또는 앞으로 달려만 가는 예술세상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수도 없이? 맨하탄을 다녔다. 그림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다.
작년에 한 친지의 맨하탄 전시에 갔었는데, 작은 갤러리 안에서 마스크를 쓴 채 그림을 보려니 그림이 제대로 눈에 들어 오질 않았다. 왠지 억지같았다.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에는 무엇 보다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자연스런 여유가 필요하다.
팬데믹 동안에는 컴퓨터로 넷플릭스 영화는 실컷 보았지만 그림 구경 가는 일은 거의 하지를 못한 세월이었다. 이제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그야말로 한갓지게 그림 감상을 하러 갈 생각이 든다.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울릴 정도로 정적이 깔린 화랑에서, 하얀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면서 흙탕물 같은 일상의 쳇바퀴에서 잠시 떠난다.
그림을 마주 하는 순간 작가의 마음이 내 가슴으로 파고 들기도 하고, 이건 뭐지? 작가와 통해보려고 마음을 넓히게 되는 그림이 있다. 그래서 예술과 가까이 하는 시간이 귀한 것이다. 특히 작가의 손길이 손에 잡힐 듯 하는 미술관에서 말이다.
나약(Nyack)에 있는 에드워드 하퍼(Edward Hopper) 뮤지엄 웹사이트를 열어본다. 갑자기 화면에 나타난 그림 속 마스크를 한 남자의 눈이 내 뒤의 뭔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림 아래에는 < 방문객들과 저희 직원들의 건강을 위해 백신을 맞은 사람들도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해주기를 바란다.>라는 안내문이 적혀있다.
에드와드 하퍼 그림의 특징이 도시 속 고독한 인간의 모습이라면, 그의 화풍으로 그려진 마스크를 한 남자야말로 고독 그 자체이다. 마스크를 벗게 된다 해도 그는 왁자지껄 친지들과 어울릴 그런 사람일까? 나의 시선을 피한 눈 빛을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
팬데믹 기간에도 무럭무럭 자라서 뛰기까지 하는 손자와 제법 아장아장 걷는 손녀가 할머니 손 잡고 미술관에서 신기한 표정으로 그림을 바라보는 장면이 눈에 보인다.
날씨가 더워지면 스톰 킹 조각 공원엘 가볼까, ‘허드슨 리버 스쿨’ 작가들의 그림이 가득 걸려있는 올라나(Olana) 하우스엘 가볼까, 집에서 가까운 뉴버거(Neuberger) 뮤지엄…. 리스트가 길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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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려/전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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