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부유키 츠지이와 ‘라흐마니노프의 밤’... 죠슈아 벨과 ‘차이코프스키 스팩태큘러’
▶ LA 필하모닉 협연 성황
▶김종하 기자의 클래식 풍경
“신은 그에게 두 눈은 주지 않았을지 몰라도 대신 다른 모든 걸 주셨다.”
전혀 앞을 보지 못하는 선천적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 연주자가 된 일본인 피아니스트 노부유키 츠지이. 지난주 할리웃 보울에서 츠지이의 연주를 함께 만난 음악 칼럼니스트는 이날 소감을 한 마디로 위와 같이 말했다. 그렇다. 이 놀라운 피아니스트를 어떻게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으랴.
피아니스트 노부유키 츠지이. [할리웃보울/HarrisonParrott 제공]
지난 16일 할리웃 보울의 ‘라흐마니노프의 밤’ 콘서트는 그야말로 숨 막히는 감동이었다. 츠지이는 이날 1부에서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명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그 누구보다 멋지게 연주했다. 츠지이의 라흐마니노프는 정말 파워풀하고 힘차면서도 그 안에 유유히 흐르는 서정을 놓치지 않았다. 피아노가 부서질 듯 건반을 몰아치다가도, 어느덧 섬세한 터치에 숨을 죽여야 했다. 3악장의 라스트 프레이즈가 그의 손끝을 떠났을 때, 할리웃 보울은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로 떠나갈 듯 했다.
츠지이는 감격스런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여러 번 인사를 한 뒤 팔짱을 낀 지휘자의 안내에 따라 무대를 걸어 나갔다. 아~ 그때서야 츠지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새삼스레 다가올 만큼 그의 연주는 그가 시각장애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게 만든 퍼포먼스였다.
츠지이는 흔히 ‘기적의 피아니스트’라고 불린다. 시각장애 때문에 모든 곡을 악보가 아닌 귀로만 익혀 연주하고, 협연 지휘자의 몸짓 대신 숨소리로 소통하며 세계적 연주자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연주를 함께 본 음악 칼럼니스트의 말대로, 츠지이는 진정 피아노와 하나였다. 스스로도 “나와 피아노는 한 몸”이라고 말할 만큼, 츠지이는 피아노 건반에 모든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부었고, 이를 그저 ‘기적’이라는 말로 부르기는 당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할리웃 보울을 메운 청중들의 뜨거운 환호와 갈채에 보답하는 듯, 츠지이는 이날 두 곡의 멋진 앵콜을 선사했다. 첫 번째는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였다. 이미 유튜브 영상으로도 유명한 츠지이의 라 캄파넬라는 객석의 뜨거운 갈채만큼이나 파워풀했다. 두 번째 곡은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카푸스틴의 재즈풍 현대곡 ‘Eight Concert Etudes, Op. 30, No. 1: Prelude'.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지만 역시 힘찬 츠지이의 연주가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날 라흐마니노프의 밤은 츠지이의 협주곡에 이어 프랑스 태생 유명 지휘자 루이 랑그레의 지휘 아래 LA 필하모닉이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을 유려하게 연주했다. 1시간 가까운 대곡이었지만 랑그레와 LA필의 완벽한 호흡은 어느덧 다소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할리웃 보울의 여름밤을 깊은 서정으로 물들이며 이날 콘서트의 대미를 장식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 [할리웃보울 제공]
이보다 앞서 지난 12일과 13일 할리웃 보울에서 펼쳐진 ‘차이코프스키 스팩태큘러’ 콘서트는 LA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지 인형' 중 너무나도 친숙한 '꽃의 왈츠'와 ‘아다지오’에서부터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울려퍼지는 1812년 서곡까지, 그야말로 LA의 여름밤이 엔젤리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같았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물론 미국 클래식계의 간판스타 중 한 명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의 무대였다. 벨은 이날 프랑스 출신의 저명 지휘자 루도빅 모를로가 지휘봉을 잡은 LA필과 함께 세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하나인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콘체르토 Op.61을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연주했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테크니션이면서도 화려한 기교를 내세우기 보다는 솔직한 감성과 부드러운 연주로 잘 알려진 벨의 이날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젊은 시절과는 다른 깊은 원숙미까지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이날 객석에서는 벨이 1악장 연주를 마치자마자 마치 전곡이 끝나기나 한 것처럼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벨의 연주는 꼭 다시 한 번 야외음악당이 아닌 실내 연주홀에서, 마이크 증폭이 아닌 악기의 생생한 원음 그대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디즈니홀에서 벨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