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고개 너머의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건 왠지 B급 영화스러운 것이었다. 둘 다 또뽑기지만 중학교는 사대문 안의 명문사립을 나온 터였다. 북악터널 반대편 연신내 쪽 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6.25때 문산쪽에서 또 동두천쪽에서 내려온 인민군 남하 코스여서 그랬을까, 발전의 속도가 더디었다.
그래도 연신내에 비하면 우리에겐 엄청난 지정학적 어드밴티지가 있었으니 손쉽게 의정부로 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의정부에는 중앙극장과 국도극장이라는 재개봉관의 거봉들이 버티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서울시 교육위의 중고생 단속에서 벗어난 치외법권 지대였다.
의정부. 6학년 때 전학 간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차가 끊겨 토요일 밤을 외박하고, 그나마 날 밝는대로 돌아왔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을 태연스레 서부영화 한 판까지 때리고 저녁 먹을 즈음 유유히 귀가했다가 몹시 혼난 기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3년 넘게 조신하게 보냈고 이제는 머리도 굵어 돌아올 차 시간 정도는 계산할 수 있으니 그 버릇이 또 도진 거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토요일, 친구들과 8번 버스를 타고 길음동에서 내려 의정부행 12번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위수지역을 넘어 ‘짬푸’를 했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엑소시스트’. 그 전 해부터 난리가 난 영화였다. 극장 안팎은 우리처럼 시커먼 고삐리들로 득실댔다. 하복이 야리꾸리했던 정릉 배밭골의 우리 학교, 역시 정릉의 짱구산에 우뚝 솟아있던 D고, 정릉천 하류에서천년고도의 영광을 재현하던 S고…. 그렇게 각 학교에서 한 반 정도씩의 인원은 온 것 같다.
막 끝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과 밀고 들어가는 학생 떼거리가 엉켜서 돗대기 시장이 펼쳐지는데 나오는 사람들 중에 키가 커서 두드러지는 백인 미군병사가 보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 이마와 양 뺨에 식은 땀이 흐른다. 와우, 무섭기는 진짜 무섭나 보다.
식은 땀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좌석을 다 채우고 통로계단에 둘씩 무릎 붙여앉고도 뒤에서 서서 보는 관객이 제법 됐다. 극장이 아니라 사우나 찜통이었다.
영사기가 돌아가며 열기가 슬슬 식기 시작했다. 뇌파검사 장면에서 피 한 줄기 착 솟구칠 때 깜짝이야, 겁 팍 먹고 소름이 돋았다. 배에 헬프 미 글자 쓰이는 건 별로였다. 동생이 단백질 알러지가 있어서 고등어 먹고 난 뒤 손톱으로 긁으면 그렇게 살이 일어나는 걸 평소 봤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는 기기기기 목이 360도 한 바퀴 돌아가는 씬. 완전 쫄았다. 침대채 붕 떠있는 것도 그렇고. 우웩 하고 쏟아내는 녹색 토사물도. 검붉은 팥죽은 좋아해도 녹두죽은 싫어하는 이유다. 애를 키워보니 엄마 뱃속에서 생긴 아기의 태변이 꼭 그런 색깔이다.
다들 허세 가득했던 나이라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온몸에 힘은 왜 그렇게 줬는지 가벼운 몸살을 앓았다. 엑소시스트를 뒤이어 오멘, 서스페리아 같은 호러물 붐이 계속됐는데 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공포영화는 피했다.
그래 나 겁장이올시다. 그런데 이거 알아요? 난 엑소시스트의 악령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 하필이면 내가 이민 와서 사는 이 동네가 엑소시스트의 본 고장 아닌가.
워싱턴 DC의 백인동네 조지타운이 영화의 배경이라서 심심하면 신문에 엑소시스트 기사가 실린다. 핼로윈 시즌에 주로 반복되는 기사에서 영화 도입부의 발굴 현장이 이라크에서도 쿠르드족 거주지라는 걸 알게 됐다. 별로 알고싶지 않은데 자꾸 알게 된다. 실제 현지 촬영 분량은 많지 않지만 퇴마사 신부가 악령을 자기 몸으로 안아 투신해서 굴러떨어지는 계단이 여기 있다는 것도.
무엇보다 이 소설/영화에 소재가 된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DC에 바로 붙어있는 프린스 조지스 카운티의 작은 동네 코티지 시티에서였으니 1949년 롤랜드 도(Roland Doe)* 사건이다. 십대 소년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괴기한 현상들…. 정체불명의 소음, 저절로 움직이는 가구들, 날아다니는 가재도구들, 덜컹대는 침대, 배우지도 않은 라틴어로 중얼대는 소년, 루터교 목사, 예수회신부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실화다.
내가 그 PG카운티를 매일 출근길에 지나서 간다. 이쯤되면 엑소시스트의 악령이 날 쫓아다니는 것 맞지 않나. 아니, 내가 악령을 좇아 나도 모르게 여기로 왔나.
*소년의 이름은 가명이다. 도(Doe)는 무명씨.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나온 도민준의 도가 아니다. 지난 2020년 86세로 별세한 뒤에 그의 본명이 로널드 에드윈 헝클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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