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욱 전 주중대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과의 만남은 인상에 가장 오래 깊이 남아있다”면서 “그는 시골학교 선생 같았다”고 말했다.
정 전 대사는 9일 버지니아 애난데일 설악가든에서 열린 포토맥 포럼의 ‘내가 만난 잊지 못할 사람’이라는 주제로 가진 첫 시리즈 강연에서 “제가 주중 대한민국 대사로 있던 1997년 2월12일 황 전 비서가 주중 한국대사관 영사관에 들어온 날로부터 필리핀의 마닐라로 가기 위해 북경을 떠난 3월16일까지 긴박했던 33일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회고했다.

이날 강연에는 올해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에 출마하는 문일룡 변호사, 김영기 워싱턴문인회장 등 40여명이 참석, 정 전 대사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정 전 대사는 “황 전 비서는 바짝 마른 몸매, 백지장 같이 흰 얼굴, 번쩍이는 눈에 조용하면서 또렷또렷한 말씨가 첫 인상이었다”면서 “그는 선비 같은 사람으로 당시 주중 한국대사관 책임자로서 그와 첫 면담을 하면서 그가 하는 말을 그대로 적으면 바로 책이 될 정도로 그는 자신의 의사를 잘 정리해서 이야기 했다”고 회상했다.

김일성대학 총장을 역임한 황장엽 전 비서는 김정일의 개인교사로 북한 정권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사상가로 1997년 한국으로 귀순한 최고위층 탈북자다. 2010년 타계했다.
정 전 주중대사는 “황 전 비서가 저희 영사관으로 와서 정치망명을 한 후 제가 가장 중요하게 챙긴 것은 그의 신변보호였다”면서 “당시 국가정보원에서 그의 한국 망명을 위해 직원이 급파되고 북한의 김정일은 ‘황장엽의 시체라도 좋으니 데려오라’고 하면서 대사관 주위에는 중국 장갑차가 에워싸기도 했다”며 당시 험악한 분위기를 전했다.

정 전 대사는 황 전 비서가 북한 저격수로부터 총을 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임시 처소를 영사관 구석에 위치한 창고실로 정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황 전 비서는 당시 망명에 실패하면 죽겠다며 독약을 갖고 있었다”면서 “내가 망명하면 내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데 내가 미쳤지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 전 대사는 황 전 비서의 직계가족은 부인과 아들, 3명의 딸을 포함해 모두 5명인데 추후 처형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황 전 비서는 자신이 체계화 한 주체사상이 북조선에서 김일성·김정일 숭배를 위한 사상으로 변질되고 왜곡되는 것에 못 견뎌했다”면서 “황 전 비서는 김일성과는 달리 김정일에게 밉보인 것이 망명의 동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정 전 대사는 “황 전 비서에 따르면 북한에서 핵개발은 김정일이 주도했는데 김정일은 북미 제네바 합의를, 합의한 종이 조각에 불과하게 생각했다”면서 북한은 핵을 결코 포기할 의사가 없었음을 알렸다. 제네바 합의는 1994년 10월 북미간 합의한 것으로 북한의 핵시설 동결을 조건으로 북한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이후 지켜지지 않았다.

황장엽 전 비서는 중국에서 제 3국인 필리핀을 거쳐 한국으로 정치망명을 했다. 정 전 주중대사는 “당시 유엔사무총장을 한 반기문 씨가 외교안보 수석이었는데 특사 자격으로 필리핀에 가서 황 전 비서가 1개월간 필리핀에 있다가 한국에 오는 것을 피델 라모스 당시 필리핀 대통령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창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