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지 속의 작은 아파트 공간에 채 뜯지도 못한 짐 꾸러미를 방 한 켠으로 잠재운 채 몇 년을 나그네처럼 머물다 이제야 정착할 새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나이듦을 의식하며 무거워지는 몸을, 이삿짐을 챙기면서 그나마 조금씩 풀어 보기에는, 가을이 최적의 시기가 아닌가. 제대를 앞둔 병사처럼 이사 날짜를 잡아 두고 보니 왠지 젊은이 못지않게 가슴이 뛴다.
무엇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다본 넓은 뜰에 무성한 나무들이 철 따라 펼치는 정경을 글 속에 담아 보기도하고, 너무 조용하여 적막감마저 드는 단독주택지역과는 달리 이곳은 많은 젊은 세대들의 어린 자녀들이 등교시간에 맞추어 각양각색의 옷차림으로 아파트단지 구석구석에서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 노란 스쿨 버스를 기다리며 한없이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소리가 잠시나마 과거로의 시간여행 떠나듯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등, 노년 이기에 더욱 살맛 나게도 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특히 새벽 출근 길 잔디 밭 위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신문을 현관문 앞까지 갖다 놓아주던, 우리가 “맥가이브”라 별명을 붙여 준 중년의 남미 출신 아저씨는 가끔씩 우리 집 고장 난 곳을 수리해 주었던 인연으로 한 동안 그 얼굴을 잊지 못 할 것 같다.
사람들은 일생을 통해서 몇 번이나 삶의 터전을 옮기며 살아 가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이사 할 때마다 언뜻 던지게 된다. 며칠 전부터 짐을 꾸리면서 줄인다고 줄인 물건 중에서도 또 다시 버릴 것은 버리다 보니 홀가분한 기분으로 새 출발을 준비한다. 젊은 날은 살림을 모으는 재미로 살아 왔다면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버리는 것이 자꾸만 손에 익숙해져 이렇듯 삶이란 닳아 없어지는 종이 두루마리처럼 갈수록 가벼워지는가 보다. 깊어지는 노년은 모름지기 흐르는 물처럼 계절 따라 오가는 세월을 끌어 안으며 조화롭게 사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호사다마라고. 어느 날 이사를 앞둔 주일 아침 외출을 하기 위해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 둔 차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입이 쩍 벌어지는 사건이 생겼다. 차 뒷문 유리 창은 산산 각각이 나 있고 유리 파편이 차 시트와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밤사이 도둑이 차를 훔쳐 가려다 잠금장치(immobilizer)가 되어있어 시동이 걸리지 않자 화가 났던지 차창을 망치로 박살낸 후 도망을 친 모양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그동안 몰던 큰 차를 처분하고 작은 차를 구입하면서 했던 말이 떠 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이 지역에는 차가 분실되거나 파손될 염려도 있으니 아예 작은 차가 적격이라고 무심코 던진 말이 그만 씨가 된 것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크고 작은 정다웠던 그동안의 추억들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라는 뜻이 담긴 사건이었나.
오늘도 넓은 아파트 주차장 너머로 땅거미가 드리워지고 무심한 듯 가로등에 하나 둘 씩 불이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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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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