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시간이 났다. 집사람이 ‘불면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 은퇴도 했고 여행으로 기분전환을 하면 어떨까 싶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가기로 했다. 내 생애 세 번째 나이아가라 여행이다.
첫 번째 나이아가라 여행은 50년전 쯤이다. 일기예보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 지도 한장만이 유일한 길잡이였던 시절이었다.
점심 때쯤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했는데 펜실베니아주를 지날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속에서도 계속 달려 어느덧 출발한 지 10시간쯤 지났을 때 눈 앞에 큰 다리가 보였다.
무엇인가 꺼림직했다. 시간을 보니 새벽쯤 됐던 것 같다. 작은 집 같은 곳 옆에 차를 세우고 보니 검문소였다. 캐나다로 가는 차는 그냥 보내고 미국으로 들어오는 차만 검문한다고 했다. 순간 뜨끔했다. 얼른 비때문에 길을 잘못 들었다고 둘러댔다. 짧은 영어지만 되돌아가고 싶다고 했더니 돌아가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되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당시 그 차에는 한사람만 영주권자였고 나머진 모두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여권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날 새벽 그냥 다리를 지났더라면, 차에 타고있던 다섯 명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식은 땀이 날 지경이다.
두번째 나이아가라 여행은 뉴욕에 살 때였다. 한국에서 작은 아버지가 캐나다 몬트리얼로 이민을 오신 것이다. 이 때 나는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정정당당하게(?) 폭포를 구경할 수 있었다. 감회가 남달랐던 기억이 난다.
올해 추수감사절 연휴에 세 번째 나이아가라에 갔다. 아들 딸에게 이번에 우린 빼고 장성한 너희들끼리 연휴를 보내라 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모두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 댔다. 우리 부부, 리치몬드에서 네 명, 한국에서도 네 명이 합류한 여행이었다.
우리 부부는 53년 만의 외출(?)이어서 무척 설렜다. 캐나다 쪽에서 하루 반을 보냈다. 무지개 색깔의 야경을 구경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사람들이 적어 약간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곳 저 곳을 다 둘러보았다. 강을 건너다 실종된 70년대 초 한인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홀로 거닐던 나이아가라 폭포, 그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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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찬 섄틸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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