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주체(朱?)는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자리를 차지한 인물로 유명하다. 비록 매우 가난하고 천한 신분 출신이기는 했어도 주원장은 몽골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 명(明)을 세운 후 황위 계승 방식을 바로잡는 심정으로 원나라의 적임자 계승 방식을 배척하고 적장자 방식을 강조했다.
문제는 그의 첫째 아들이자 황태자인 주표(朱標)가 너무 빨리 사망하면서 발생했다. 다음 황제 자리를 다른 아들 가운데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손자에게 넘겨줄 것인가.
주원장은 한족답게 적장자 방식을 고수했고, 결국 손자인 주윤문(朱允?)을 낙점했다. 이때부터 넷째 아들 주체는 불만이 생겼다. 왜 능력 있는 아들을 배제하고 아직 애송이와 같은 조카를 선택한다는 말인가. 결국 아버지가 사망한 후 주윤문이 2대 황제인 건문제로 등극했고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조짐을 간파한 연왕(燕王) 주체는 정변을 계획해 1399년 음력 7월 5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명분은 “어지러움을 척결해 나라를 평정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건문제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찬탈한 ‘쿠데타’였다. 1402년 7월까지 3년 동안 지속된 정변 기간에 주체의 세력은 초반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고비 전투마다 전세를 역전시키며 수도 난징(南京)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주체는 명의 제3대 황제인 영락제로 등극했다.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베이징의 불교 네트워크라는 배후 세력을 손꼽을 수 있다. 대표자는 경수사(慶壽寺)의 주지였던 요광효(법명 도연)였다. 요광효는 ‘정난의 변’의 실질적인 설계자이자 영락제의 책사였다. 이처럼 성공한 쿠데타를 통해 주체는 황제로 등극했지만 정변을 통한 집권은 영락제의 통치 내내 큰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영락제는 불교를 후원했고 불교계는 영락제의 정치적 정통성을 보완해줬다. 정치와 종교의 상호 의존성은 영락제의 쿠데타에도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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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헌 / 고려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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