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로 대통령에 오른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가 1956년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나폴레옹3세 당시 프랑스 자금으로 건설된 수에즈 운하는 이후 영국이 주식을 사들여 운영 중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손잡고 이집트를 공격한 게 바로 제2차 중동전쟁이다. 당시 앤서니 이든 영국 총리는 나세르를 ‘중동의 히틀러’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국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군사 작전을 폈다. 뿔이 난 미국은 유엔 총회에서 영국에 대한 제재와 휴전 촉구안을 결의했다. 런던 금융 시장은 공황에 빠졌고 파운드화의 기축 통화 지위에도 금이 갔다. 결국 영국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영국의 시대가 끝났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 순간이 됐다. 이를 ‘수에즈 모멘트’(Suez Moment) 또는 ‘수에즈 위기’라고 부른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향한 관세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상호관세 발효 13시간 만에 중국을 제외한 국가엔 90일간 유예하겠다고 말을 뒤집었다. 증시는 물론 미 국채 가격까지 폭락하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어 스마트폰에 대한 관세 면제도 검토 중이라고 후퇴했다. 미국 소비자가 애플 아이폰(메이드인차이나)을 살 때에도 부담이 커진다는 우려가 결정적이었다. 트럼프는 양치기소년이 됐다. 기축 통화로서 달러화 가치도 흔들리고 있다. 올 들어 8%나 하락하며 월가마저 돌아서고 있다. 사실상 미국판 수에즈 모멘트란 진단이 나오는 이유다.
■ 영국의 수에즈 모멘트는 한때 해가 지지 않던 제국의 오만을 버리지 못한 채 군사적 도박에 나섰다 굴욕을 당한 경우다. 우방까지 난처하게 해 등을 돌리게 만든 게 패착이었다. 친구조차 공격하는 트럼프의 관세 도박도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미국의 가장 큰 자산인 동맹의 가치를 스스로 내팽개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중국은 속으로 웃고 있다.
■ 수에즈 모멘트 후 이든 총리는 물러나야 했다. 전 세계적인 반트럼프 물결이 심상찮다. 트럼프가 정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을지(Make America Great Again), 이든 총리의 전철을 밟을지 지켜볼 일이다.
<박일근 / 한국일보 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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