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처럼 이상고온엔 냉장고의 보리차가 최고네 하는 순간, 보리차에 얽힌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오래전 호주 퍼스(Perth)에서 살 때 얘기다. 그곳의 여름은 보통 섭씨 40도-50도가 다반사다. 다행히 습도는 낮지만 햇볕의 따가움이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잠깐 동안 차안에 놓아둔 크레용이 팍팍 녹아내릴 정도니까. 그 날도 너무 뜨거워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헬로!”소리가 났다. 문을 여니 큰 모자를 쓴 제니가 땀에 젖은 얼굴로 서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 그 꿀맛 같고 시원한 보리차 생각에 들렸다나.
그녀는 그곳에서 제일 처음 사귄 친구다. 제니의 둘째딸과 내 아들이 같은 유아원에 다닌 인연이었다. 아들을 데리고 유아원에 간 첫날, 나는 구석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꼴로 입 꽉 다물고 긴장해 있었다.
그때 내게 커피를 권하며 말을 걸고는 다른 엄마들에게 나를 소개시켜준 여자가 제니였다. 그 후 여러 가지로 그곳에서 사는데 필요한 정보와 지리를 알려주고, 무료 에어로빅 클래스도 데리고 갔다.
그녀가 찬 보리차 맛에 반하게 된 연유는, 테니스게임이 끝난 후, 내가 갖고 간 냉 보리차 맛을 보고서다. 그들은 찬 얼음물이나 오렌지주스를 갖고 다녔는데, 내 보리차를 마셔보더니 “Lovely!”를 연발했다. 물 빛깔을 보곤 중국차나 일본차인줄 알고 마신 눈치였다.
그런데 그런 차랑 달리 강렬하게 톡 쏘는 향기와 씁쓰레한 맛이 없고 구수해 인상적이었나 보다. 거기다 그런 차들은 너무 뜨거워 한 모금씩 야금야금 새처럼 맛을 봐야했는데, 이 차는 훌훌 뻘떡뻘떡 들이킬 수 있었으니 더 좋았나보다. 이게 도대체 뭐냐고 묻기에 떠오르는 대로 ‘발리 티’라고 했다.
몇 십 년 전에 배운 지식을 활용, 너희도 아다시피 보리엔 비타민 B가 많아 각기병에 좋다. 이것을 마시면 밥맛도 증진된다고 짧은 영어로 신나서 건강강의를 했었다. 그들은 “원더풀!”하더니, 그럼 이 티를 운동하고 난 후에만 마시냐고 물었다.
그래서 남녀노소가 사시사철 다 마신다. 겨울엔 뜨거운 차로, 여름엔 차가운 차로. 식사 때는 물론이고 맹물대신 수시로 이걸 마신다고...
“야 코리안들은 참 좋겠다. 우린 기호에 따라 조그만 박스에 들은 중국차나 일본차를 어쩌다 어른들만 마시고 그 값도 비싼데, 부럽다.”
물론 나는, 너희나라처럼 수돗물을 마음 놓고 마실 수가 없는 수질이라, 궁여지책으로 발리 티를 마실 수밖에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집안에서 신발 벗는 관습을 알고는 코리안 들이 깨끗하고 스마트하다나.
그랬는데 생명 같은 물을 더럽히고 방치, 그냥 마시면 탈난다는 코리아의 현실을 어찌 알리겠냐 말이다. 그 후론 제니는 운동이 끝나면 꼭 내 보리차만 마셨기에, 오늘도 보리차생각에 우리 집까지 온 거였다. 땀 뺀 후 갈증을 해소해주던 그 시원하고 달디 단 물맛이 당겨서.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그 보리차가, 이렇게 훌륭히 국위를 선양하고 민간외교원 노릇을 톡톡히 할 줄은 진짜 몰랐다. 사실 땀이 난 후에 마시는 그 찬 보리차 맛은 정말 훌륭하다. 들쩍지근하고 시큼한 오렌지주스나 오히려 갈증만 더 유발하는 소다나 쌉쌀한 맥주 맛에 비하겠는가 싶다.
내가 퍼스를 떠나던 날 제니가 내게 물었다. “인숙! 너는 Perth에서 몇 가지나 배우고 가는 거지? 영어, 운전, 그림, 볼링, 배드민턴, 엑스사이즈, 테니스”
눈을 찡긋하고 웃으며 애써 눈물을 감추던 다정한 제니의 얼굴을 그리며,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 있다. ‘네 덕분에 보리차 맛의 진가를 알고 재인식을 하게 된 것도 추가야.’
호주를 떠나 미국에 산지 오래됐어도 보리차를 마실 때면 제니가 떠오른다. 중국차나 일본차보다 스트롱(Strong)하지 않고 스윗(Sweet)하다던 그녀의 말이 상기돼 더 근사한 맛으로 다가온다.
문득 보리차도 맛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 잣도 띄우고 하면, 세계적으로 뜰 여지가 있지 않을까? 인삼차모양 우리나라 토속차로 격상시킬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을까? 호주 친구들의 선호반응실험(?)결과를 회상하면, 대박 날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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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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