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빌린 책을 반납할 겸 도서관에 가서 오후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굵은 빗줄기를 뚫고 도착한 도서관 서가에서 책을 뽑아 자리에 앉고 나서야 알았다. 안경을 챙겨오지 않았다는걸. 안경 없이 장시간 책을 보는 건 무리였다. 정기간행물실에서 대여섯 종의 신문을 일람한 뒤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햇살이 쨍하게 내리고 있었다. 쾌청하게 부는 바람에서 진한 솔향이 풍겼다. 둘레길 산책을 하려고 길모퉁이를 돌던 때였다.
“여기,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난 계유정난이 바로 그 사건이야.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위를 빼앗은.” 작은 공터 원탁에 아이 셋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책 중 하나에 ‘초등 5학년 한국사’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니까 단종이 우리 나이였다는 거잖아. 어떻게 삼촌이 조카한테 그러냐? 권력에 미쳐서 완전히 돌아버린 거지.” 이야기를 주도하던 아이가 쿡쿡 웃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TV에서 진짜 소름 돋는 말을 들었거든. 권력은 자기 아들과도 나눌 수 없는 거래. 근데 1453년에는 유럽에서도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일어나. 왕위를 놓고 잉글랜드랑 프랑스가 100년 넘게 치고받고 했던 백년전쟁이 끝나고, 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는데….”
사회심리학자 쿠르트 레빈이 만든 ‘러닝 피라미드(학습 피라미드)’가 떠올랐다. 공부법에 따른 학습정착률을 피라미드 형태로 그린 그림이다. 레빈에 따르면 우리 두뇌에 가장 잘 기억되는 공부법은 바로 ‘서로 가르치기(정착률 90%)’라고 한다. 그 뒤를 잇는 것이 복습(75%)과 그룹 토론(50%). 참고로 혼자 교재를 읽는 것(10%)만도 못한 최하위 학습법이 우리가 학창 시절 내내 지겹게 반복해 온 그것, ‘수업 듣기(5%)’다. 그러니까 이 아이들은 지금 효율성 최상인 ‘가르치기’와 ‘토론’을 시연하는 중이었다. 근처 벤치에 슬그머니 앉았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옆 동네 사는 친구 엄마가 부탁을 해왔다. 학년 말까지만 친구 공부를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그이가 보기에 나는 좀 상냥한 아이였던 것 같다. 이후 매주 세 번 친구 집에 가서 같이 숙제하고 예습·복습을 했다. 석 달이 지나고 쑥 올라간 성적표를 받아 든 친구 엄마는 500원짜리 지폐 여섯 장이 든 봉투와 사과 궤짝을 들고 우리 집으로 오셨다. ‘선대(先代)의 기억’이니 ‘우정’이니 들먹이며 엄마가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그 빳빳한 지폐를 나는 만져보지도 못했다. 크게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내 성적 역시 뜀틀 넘듯 도약했으니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20분 넘게 역사토론을 이어가던 아이들이 일어서면서 까르르, 웃고 까불었다. 안경을 챙기지 않은 탓에 오늘 도서관행은 헛걸음이구나 싶었는데… 독서보다 상큼한 행복감에 취한 나는 주택가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홀린 듯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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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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