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 푸르른 하늘과 어우러진 어느날 고교 백일장 심사에 다녀왔다.
학교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여선생님이 계셨고, 학생들 역시 한국어와 한글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아이들이 한국어로 글을 쓰는 모습을 보며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오래 전, 한글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기억이 문뜩 떠올랐다.
그때처럼 나는 아이들이 써 내려간 문장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소중히 읽으며 글을 골랐다. 시나 수필을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써 내려가는 창작의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아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생각에 집중했다.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며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은 참으로 진지했으니 말이다.
특히 K-pop이나 K-drama의 영향인지, 한국어을 배우려는 외국 학생들까지 한글로 쓰는 글짓기에 참가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날 교실에 앉아 있던 학생들은 그동안 배운 한글실력으로 자신의 경험과 창작의 글을 표현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자라온 아이들은 각자의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담겨 있었다. 그들이 쓴 글을 읽으며 나는 깨달았다. 아이들은 이미 자기 본연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순수함을 지키며, 세상을 배우고 있었다는 것을.
교실에는 ‘bully is never ok’라는 남을 괴롭히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문구가 있었다.
한국어 글짓기를 위해 온 그들을 보며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 외로움을 담은 한국 영화 ‘파수꾼’이 떠올랐다.
친구들 사이에서 서서히 소외되어 결국 낙오가 되어버린 한 소년의 이야기.
그 불안하고도 외로운 사춘기의 단면이 지금 눈앞의 아이들과 겹쳐 보였다.
그리고 J.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이 생각났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위선적인 어른들을 분노하며,“진짜가 아닌 사람들(phonies)”을 혐오하고, 순수함이 사라져가는 세상 속에서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어 한다. 그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게 막고 싶다고 말한다.
넓게 펼쳐진 호밀밭은 세상 속 순수한 아이들의 세계를 상징한다. 호밀밭 끝에 있는 절벽은 어른이 되며 맞닥뜨리는 타락, 위선, 혼돈이다. 홀든이 지키고 싶은 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인공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지만 자신만의 살아남아야하는 현실앞에서 충실하게 사는 법만을 쫓으며 살 뿐이었다.
존 레논을 저격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은 실제로 그의 열렬한 팬이었지만 사건 직후에도 이 책을 들고 있었고, 체포될 때까지 그 책을 읽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에 저지른 일이지만 이 책은 그에게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일종의 성서였고 자신만이 부폐한 사회를 구하겠다는 왜곡된 의미로 해석되었다.
문학은 독자가 어떻게 해석되는가에 따라 날카로운 칼이 되기도 하고,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며 디딤돌 역할을 하기도한다.
아이들이 앞으로도 한글을 잊지 않고, 한국어도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한국인이 되도록 열심히 배우길 바란다.
Korean American 이라는 말은 한국인으로서 한국어를 잘해 미국 사회에서도 당당한 자존감 높은 어른으로 성장해 사회에 일원이 되야 한다는 말이다 .
세상이 많이 변하고 각박하고 인정없는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그 마음속에는 자신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바른 자아상과 순수함을 잃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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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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