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다. 프랑스에서 만나 오십 년을 넘게 우정을 이어오는 막역지우(莫逆之友)다. 그녀는 다방면에 걸쳐 박식하지만 요리에는 더욱 일가견을 가진 미식가다. 오늘 만남의 장소는 프랑스 요리와 베이커리를 겸한 카페다. 나는 그녀와 파리에서 같은 시대를 공유했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대화가 잘 통한다. 서로 말꽃을 피우다 보면 젊은 날의 추억이 기지개를 켜고 우리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오늘 대화의 주제는 빵 이야기다. 난 일생 기억에 남는 세 곳의 빵에 대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
파리 시내의 11구에 우리집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건물 일층에 있는 고풍스런 베이커리로 내려간다. 아침식사로 갓 구운 바게트 빵 반쪽과 크로와상 두 개를 산다. 빵 냄새가 인간의 본능을 깨운다. 식사 후엔 아기들을 데리고 햇볕 좋은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향한다. 사끄레쾨르 성당앞 비둘기에게 먹다 남은 빵부스러기를 주고, 화가들이 모여있는 떼르트르 광장을 둘러본다. 그때가 1970년 중반이었는데도 관광객은 넘쳐났고, 화가들이 보여주는 세상은 신기하기만 했다. 내려오는 길에 카페 앞 의자에 앉는다. 배우 같이 잘생긴 할아버지에게 바게트 샌드위치를 주문한다. 처음 먹어 보는 절묘한 맛, 나는 그 카페의 샌드위치를 평생 빵맛의 기준으로 삼는다. 내 생애 맛있는 빵집 일호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파리에서 벨기에를 거쳐 암스테르담에 가는 기차를 탄다. 넓은 포도밭을 지나고 라벤다가 흐드러진 북프랑스 리르(lille)를 지나면 곧 이어 암스테르담에 도착한다. 여섯 시간 걸리는 여행이다. 삼각형 지붕이 멋드러진 호텔에서 내 생의 잊을 수 없는 두 번째 빵을 만난다. 보통 빵을 서빙할 때는 바구니에 담아 내놓은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호텔은 뚜껑 달린 은식기에 담겨 나왔다. 부드럽고 촉촉하고, 고소하고 은은한 향이 입을 멈출 수 없게 했다. 연인들이라면 살짝 키스를 나누고 싶을 듯한 은밀한 맛이었다.
나의 세 번째 일생의 빵은 캐나다의 록키산맥을 여행할 때 만난다. 울창한 산림과 쪽빛 호수, 숨통이 트이고 세상 분진(粉塵)이 모두 날아갈 것 같은 청정한 공기, 이곳엔 때묻지 않은 순결한 사람만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록키산맥의 최고봉 마운트 롭슨(Mount Robson) 가까운 동네에 지인이 살고 있었다. 산속에 자리한 그 집은 이층 목재집으로 테라스에 제라늄 꽃이 활짝 피었고, 마당 한켠에는 장작이 탑을 이루도록 쌓여 있었다. 저녁식사에 할머니가 직접 구운 호밀빵을 내오셨다. 산에서 블루베리를 따다가 만들었다는 쨈과 집에서 기르는 산양 젖이라며 같이 먹어보라 권하셨다. 아, 이 신선한 빵!. 록키산 신령들이나 먹을 것 같은 자연의 맛, 할머니의 고향 독일식 빵이었다.
빵은 생명의 양식이다. 또한 세상을 하나로 품을 수 있는 사랑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한 집에서 같은 빵을 나누는 사이를 가족이라 하는데 우리집 양반은 먹는 것에 무심하여 빵이 빵맛이지 별다른 게 없다는 주장이다. 맛을 중시하는 내가 반론을 제기하려 하나 나도 배고팠던 시대의 증인이기에 입을 다문다. 하지만 맛이 주는 기쁨을 주고받는 친구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나저나 저녁밥은 어떻게 하지? 투고(To Go)를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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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옥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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