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두 주간동안 나는 남가주한국학원 학생들의 글짓기 대회 원고와 뜨거운 씨름을 했다. 한국에서 분필 가루 날리던 교실을 떠난 지 무려 46년 만이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아이들의 글씨를 마주하는 동안 내 마음은 어느새 반세기 전 교실로 돌아가 행복했다. 또한 이 심사는 내게 단순한 평가의 시간이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온 우리 민족의 정신이 어떻게 대를 이어 흐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경이로운 목격의 시간이기도 했다.
이번 글짓기 대회는 신춘상 교육감이 최초로 시도하는 행사로 각 학교 교장 선생님의 감독하에 실력을 겨루는 대회였다. 나는 심사위원으로서 출생 정보를 확인하며 몇 번이나 눈을 의심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학생과 견주어 손색없는 어휘와 문장력을 갖춘 아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놀라움은 이내 깊은 감동으로 치환되었다. 언어는 정체성을 담는 그릇이라 했던가.
주말마다 한글을 익힌 아이들은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더 나를 흐뭇하게 한 것은 글의 내용이었다. ‘나의 미래’와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주제로 한 문장 속에는 이기적인 성공의 문법이 없었다.
‘잘 나지는 않아도 남을 돕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쓰레기가 없는 세상, 불쌍한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함께 행복하고 싶어요.’ 아이가 꿈꾸는 미래는 어른이 그려놓은 경쟁의 장이 아니었다. 타인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높은 의식의 세계였다. 순수한 영혼이 한글이라는 도구를 빌려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는 나에게 오히려 큰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사실 아이들에게 한글은 ‘모국어’가 아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어(Heritage Language)’다. 사용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사용하지 않아도 사는 데 불편이 없는 언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열심히 한글학교를 다니다니. 경외심 마저 들었다. 토요일마다 학교로 향하는 길은 결코 가볍지 않았을 거다. 잠을 더 자고 싶은 아이도, 한 주간의 고단함이 채 가시지 않은 부모도 수없이 흔들렸을 거지만 그 반복된 걸음 속에서 아이들은 한 언어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자기 삶을 지탱할 뿌리를 키웠다.
문장 속에서 나는 보았다. 두 문화를 건너며 살아갈 아이들이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부모의 헌신과 아이들의 성실함이 만들어 낸 이 작은 기적이야말로 이민 사회에서 한국학교가 존재해야 하는 가장 분명한 이유가 될 것이다.
1972년 29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무궁화학원’이 50여 년이 흐른 지금, 11개 지역 1,500여 명이 함께하는 거대한 학교가 되어 자랑스러운 ‘Korean-American’을 길러내고 있으니. ‘남가주한국학원’이야말로 교민사회가 일군 위대한 문화자산이 아닐까.
한국학교 교사와 학부모는 단순히 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뿌리의 자부심’을 물려주고 있으며, 아이는 그 유산을 받아 자신만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이들이 훗날 미국 사회의 주역이 될 때 가슴 속에는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이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46년 만에 마주한 아이들의 원고지. 그 위에는 우리 동포의 미래가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그 당당한 걸음에 박수를 보내며 나 또한 이 위대한 여정의 증인이 된 것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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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희 소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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