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은 예술가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서사로 조직하고, 그것을 하나의 브랜드로 설계한 근현대 미술의 초기 사례다. 그는 타히티로 떠난 이유를 ‘인류의 유년기로의 회귀’라 설명했지만 그 원시성은 서구 미술 시장의 욕망을 향해 정교하게 조율된 시선이자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인상주의가 포화 상태에 이른 파리 미술 시장에서 정규 교육도 아카데미적 경력도 부족했던 그는 회화 실력 대신 ‘문명을 떠난 야인 화가’라는 서사를 구축했다.
고갱은 순수성을 찾아 식민지로 향한 야인, 근대에 저항하는 예언자의 이미지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회화·편지·회고록, 심지어 사적인 관계마저도 이 서사를 강화하는 재료가 됐다. 타히티의 풍경과 원주민 여성의 몸, 신화적 상징은 그렇게 유럽 부르주아의 욕망을 겨냥한 시각적 언어로 재편됐다. 1897년에서 1898년 사이에 그린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누구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이 전략이 한껏 응축됐다. 화면 안에서 시간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흐른다. 아기를 내려다보는 여성에서 성숙한 육체로, 다시 고개 숙인 노인의 형상으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원주민 여성의 누드는 문명의 손을 타지 않은 원시성의 알리바이다. 배경에는 타히티의 민속 신앙을 대변하는 우상이 등장한다. 타히티의 판타지 체험을 집대성한 결정판이요 기념비적 상품인 셈이다.
이 서사 위로 고갱 자신의 병과 가난, 딸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비극이 덧입혀졌다. 고통 속에서 잉태된 작품의 서사로 인해 그는 삶과 죽음의 비밀을 응시하는 사상가로 격상됐다. 타히티는 졸지에 계시의 장소가 됐고 가난은 순교로 번역됐다. 문명을 등지고 떠나야만 했던 예언자 고갱의 이미지가 이렇게 완성됐다.
고갱의 경제학은 즉각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사후 미술사와 시장의 공모 속에서 폭발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오늘날 그의 타히티 회화는 수억 달러에 거래되며 그의 이름은 타히티 관광 산업에서 분주하게 소비된다. 예술의 가치는 작품 자체 이상으로, 그것을 소비하고 소유하려는 욕망 경제의 교차점에서 탄생한다. 고갱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일찍 알아채고 치열하게 실현한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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