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피는 소리를 듣는다. 새들의 청아한 노랫소리에 이끌려 문을 연다. 꽃향기 그윽한 뒤뜰에는 하얀 매화가 활짝 피어 화사하게 웃고 있다. 작은 새들이 매화와 그 옆에 핀 분홍색 사과나무꽃을 번갈아 날며 즐겁게 노래한다. 년 초에 내린 찬 비바람을 잘도 견뎌낸 꽃봉오리들이 자랑스럽다.
내 어렸을 적 봄 역시 뒤뜰의 장독 뒤에 핀 매화가 제일 먼저 알려주었다. 아직 큰 항아리 밑에는 잔설이 있을 때, 매화가 몽실몽실 맺히고 피며 “새봄이 왔어요.”라고 외치는 소리로 우리 집 봄은 시작됐다. 차가운 바람에 실려 온 그 향기는 어린 시절부터 그 집을 떠날 때까지 내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매화의 꽃말은 고결한 마음, 기품, 결백, 인내로, 추운 겨울을 견디고 가장 먼저 봄을 알리며 피어나는 매화의 특징에서 유래하여, 선비의 굳은 지조와 강인한 정신을 상징하는 꽃이다. 빨간 꽃받침에 5개의 하얀 꽃잎과 여러 노란 꽃술의 고결한 자태가 그의 꽃말로 말해준다. 퇴계, 이황은 ‘매화는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라는 말로 평생 그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며, 의지와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뒤뜰에 매실나무를 심은 지 어언 이십 년도 지났다. 그동안에도 쉬지 않고 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었지만, 꽃과 눈 맞추어 보지 못하고 지냈다. 그저 매실을 따서 매실청을 만드는데 만 바빴다. 이민자의 가파른 계곡을 오르고 내리는 삶 속에서 마음의 귀가 닫혀 봄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꽃보다는 열매만을 향해 달려온 지난 세월이 너무나 아쉽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중략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난/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시를 반추해 본다.
내 주변의 자연과 사람들과도 더 진심으로 다가가서 더 말을 걸고 귀 기울이고 사랑해야겠다. 꽃봉오리가 만개하지 않을지라도.
이 봄에 핀 매화가 열정과 낭만을 잃은 메마른 가슴에 봄 처녀 마음을 선물로 주었다.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작별할 때 어린 왕자에게 선물로 준 비밀 “제대로 보려면 마음으로 봐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이라고 했듯이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던 어린 왕자가 깨어나 다시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한다.
아직 산에는 흰 눈이 덮여 있는데, 땅 깊은 곳에서 잠자던 생명이 고개를 들고 있다. 내 마음에도 깊은 샘에서 생수를 퍼 올리듯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연의 변화는 우리 내면의 계절도 바꾸나 보다. 지난봄에는 산에서 노란 개나리꽃 같은 스카치 부름이 활짝 피어있는 꽃길을 걸었다. 그 꽃길은 나를 영원히 꽃길로만 걷게 할 것 같았던 중학교 시절을 그립게 했다. 새 학년이 시작된 3월이면 학교 교정에 병아리 같은 노란 개나리꽃이 피어 우리를 설레게 했다. 그 아름다운 꽃길을 함께 걸으며 김소월의 ‘진달래 꽃’’산유화’를 읊으며 놀았던 그 친구들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이 봄을 맞고 있을까?
사랑하는 친구들아, 봄이 오는 소리를 마음으로 보며 매화처럼 하하, 개나리처럼 호호 큰소리로 웃어보자.
<
김영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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