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참전용사들뿐만 아니라 전쟁중에 부모를 잃고 미국가정에 입양돼온 한인 전쟁 고아들에게도 특별한 의미로 와닿는다. 이들은 미국인 양부모밑에서 미국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아직도 희미한 반세기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기위해 방황하고 있다.
워싱턴주 벨링함에서 한국 전쟁고아들을 위한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는 조지 드레이크 박사는 전쟁 고아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전쟁당시 미군이 운영하던 고아원만 전국에 18곳, 원생 수는 4,000명에 달했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고아원봉사활동에 나서게 됐다는 그는 "미군이 한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싸웠다는 점외에도 10만에 가까운 전쟁고아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역사가 기억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운영하는 ‘한국전쟁고아 기념사업위원회’ 웹사이트에는 한국전 당시 미군의 보호를 받던 전쟁고아들의 사진과 미국에 입양돼 온 전쟁고아들의 이야기들이 한편의 소설처럼 펼쳐져있다.
42년전 미군병사에 의해 입양돼 미국에 온 수지 앤런씨는 자기의 고향과 생일은 물론 생부모의 생사조차 모른채 한 평생을 살아왔다. 한국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군용비행기에 태워져 제주도의 한 고아원으로 실려간뒤 어설픈 영어로 미군에게 물과 사과를 받아먹던게 거의 전부다. 잊혀진 삶의 기억을 파헤치는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정신심리학자에게 상담을 받기까지 했지만 끊어진 필름을 이어보려는 스스로와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네살때 부모에 의해 길거리에 버려진뒤 백인가정에 입양돼 온 토머스 박 클레멘트(48)씨는 요즘도 열병을 앓을때면 전쟁당시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그의 생모는 추운 겨울아침 어린 클레멘트를 서울의 어느 거리로 데리고 나가 ‘뒤를 돌아보지 말아라"고 한뒤 작별의 인사나 포옹도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그것이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그의 마지막 기억이다.
홀트아동복지회 부회장이며 최근 백악관 아태자문위원에 선임된 수잔 칵스(한국명 홍순금)씨도 전쟁고아다. 부모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고 양부모도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다. 단지 자신이 미국에 입양돼온 167번째 한국 어린이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영국인 사병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전쟁과는 운명적 인연을 갖고있다"며 "한국전은 50년이 지났어도 나의 삶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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